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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Jul 24. 2024

육아휴직 12주 차 : 변검술사의 아내는 죄가 없다

아빠 육아 : 240415-240421



 아내와는 -연애 기간을 포함해서- 십 년을 넘게 다투고 있는 사이지만(우스갯소리로 라이벌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올 해는 양상이 살짝 다르다. 어젯밤도 육퇴 후에 소중한 서로의 자유시간을 낭비해 가며 언쟁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약간 이상했다. 이런, 일방적인 싸움이다. 나는 아내에게 맥락 없이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매치리뷰를 회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메타인지를 하기까지 백일이나 걸렸다. 부끄러웠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잠이 오질 않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너그러웠던 지난주의 마음가짐은 거짓말처럼 종적을 감추었다. 벚꽃 같다. 감정의 기복이 중학생 같다. 요인이 무엇일까. 쌓여 있는 집안일을 뒤로한 채 밖을 거닐어 보기로 했다. 그 와중에 아내(대인배)가 추천해 주는 동네 가게를 몇 군데 들렀다. 사장님들과 작고 깊은 대화를 하며 소소하게 웃었다. 신기하게도 기분이 풀렸다. 에너지가 심히 내 안에서만 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안 그래도 잡념 많은 아이(중학생 이후로 전혀 성숙하지 않은 내 자아)를 너무 집에 혼자 두었나. 머쓱해졌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사회생활에 지쳐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대인관계에 과도한 에너지를 쓰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변검술을 쓰는 경극배우처럼 마주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얼굴을 준비해야만 했다. 연기 스펙트럼이 꽤 넓었다. 그렇게 가식이 덕지덕지 묻은 낯짝으로 집에 돌아와 세안을 하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나의 그런 일상이 구역질 나기도, 어쩔 땐 뿌듯하기도 했다. 내 본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몰라주면 서운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괴이하고 피곤한 관종이었다.


 심각한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지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 가여운 가면 히어로에게도 인간적인 순간은 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모자나 안경을 고쳐 쓰듯 무의식적으로 가면이 벗겨지는 찰나, 지나고 나서 보니 그런 상황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칭하는 소통 내지는 교류였던 것 같다. 나름의 독소 중화과정이었다. 그런데 회사를 가지 않으니 도통 그런 기회조차 없다. 스스로 만드는 법은 이 나이 먹도록 연습하지 못했다. 막연히 온라인을 믿었던 내가 바보다. 이미 군대에서 경험했던 실수를 망각했었다. 싸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싸이월드 파도를 신나게 타고난 후의 그 기분. 타인이 견딜 수 없이 부러워 백사장 모래알을 퍼먹고 싶어지는 그런 정서.


 다시 사안으로 돌아오겠다. 나는 왜 아내와 건전하게 자웅을 겨루지 못하고 철없는 도발만 일삼고 있을까.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잔인하다. 자신에게 스스로 화낼 용기가 없어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감정을 전가시키는 행위는 분명 이기적이다. 내 민낯을 본 것이 죄도 아닐터인데, 생각할수록 송구하다. 나는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마음이 치유될 것이라 예상했던 생각들이 무색해진다. 언제쯤 자력으로 당당하게 서있을 수 있을까. 하원길에 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아이를 보니 괜스레 조급해진다. 일단 SNS를 하는 시간은 좀 줄이도록 해야겠다.




 나는 뭐 하나 하려고 해도 늘 누가 옆에서 지켜봐 주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득 외롭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어렵다.(중략) 결국 나는 오늘도 일기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덮는다. 나는 언제쯤 누가 보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를 잘 들여다볼 수 있을지, 커가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문상훈,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2024)





240415(월) : 비가 온 날, 어린이집에 다녀와 아빠와 집에서 뒹굴거렸다. 여독이 남아 있어서 피곤했다.

240416(화) : 하원을 하고 아빠와 매주 가는 까루나에서 포틀럭 파티. 이제는 이곳 분위기에 많이 익숙해지고 있다.

240417(수) : 어린이집에서 처음으로 낮잠을 시도했다. 가뿐한 컨디션으로 아빠와 홍연길 산책을 했다. 갤러리를 세 군데 들르고, 해브어밀에서 산 빵을 사이좋게 뜯어먹으며 귀가했다.

240418(목) : 어린이집 하원 후 아빠와 카페 폭포에 가서 라이브 공연을 보았다(인생 첫 락 공연에서 본 밴드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퇴근한 엄마를 만나서 같이 귀가했다.

240419(금) : 하원을 하고 아빠 품에 안겨 처음으로 안산 봉수대에 올랐다.(인생 첫 산 정상 등반)

240420(토) : 과천 서울 대공원에 갔다. 코끼리열차와 리프트도 타보았다. 호랑이, 말레이곰, 불곰, 반달가슴곰, 공작, 원숭이, 악어, 거북이, 독수리를 처음으로 보았다(코끼리와 기린은 잠이 들어 보지 못했다). 같이 간 지호오빠네, 이현언니를 집으로 초대했다.

240421(일) : 엄마아빠와 아침 산책을 했다. 다정한 마음에 가서 같이 김밥을 먹었다. 티치에 가서 주스를 얻어 마셨다. 오후에는 외할아버지와 사촌오빠가 와서 신기한 놀이터에 갔다. 탈색하려고 미용실에 가는 아빠를 따라나섰다가 앞머리도 잘랐다.



1인 2역(변검술사의 아내까지 3역)으로 바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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