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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Jul 31. 2024

육아휴직 13주 차 : 정서의 고향

아빠 육아 : 240422-240428



 동네에 좋은 가게들이 많은 건 복이다. 4년 전, 이 지역으로 이사 와서 산책을 하다가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굉장히 느리면서도 왠지 단단한 느낌에 매료되었다. 서울이지만 고향 같았다. 동네를 덕질하는 SNS 계정도 만들었다. 이 닉네임(홍 연길)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저기 공간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이곳이 진짜 고향인 아이가 태어났다. 이 좋은 동네에서 함께 보내는 시절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졌다. 자연스레 시간을 아카이빙 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저당 잡는 태도는 이제 갖다 버리고자 다짐했다. 어지러운 마음을 청소하고 싶었다. 뭐라도 쓰고 싶어졌다. 글감은 항상 거닐던 곳에 가까이 있었다. 고마운 심정을 담아 홍연길에서 느끼는 감정을 적어나가고 싶었다. (홍연길 인스타그램 @hongyeongil_seoul, 2023. 7. 2)




 산책은 프로, 육아는 아마추어인 내가 아이를 업고 지고 동네를 누빈다. 아이가 어려서 멀리는 못 간다. 동네만 누빈다. 매일 가니 자연스레 자주 가는 가게들이 생겼다. 쑥스러움이 많은 나는 원래 단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왜 인터넷에 그런 글 있지 않나, 자주 오는 것 같아서 말을 붙였더니 발길을 끊었다는 미용실 남자 손님. 그거 딱 내 이야기다. 그런 내가 변했다. 가게 사장님들께 아이를 인사시키며 다닌다. 시나브로 세미프로 수준의 단골손이 되어버렸다. 나아가서는 매주 화요일 도자기 공방에서 열리는 반찬 나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놀란다.


 새로운 곳만 탐닉하던 때도 있었다. 아니 거의 그러했다. 핫플이란 곳만 찾아다녔다. 그 시절을 ‘누군가 유명한 곳을 얘기하면 “어 거기 가봤어”라고 말하고 싶어 환장하던 때’라고 명명하고 싶다. 안 가보고 가봤다고 한 적도 있다. 뭐든 주워듣고 싶어 스마트폰을 끼고 살았다. 트렌드를 겉핥아 먹으며 남의 취향을 탐닉했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동경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며 처음 보는 광경을 맛보며 도파민을 분비하고 싶었다. 무작정 넓혀야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연히도 한계를 맞이했다. 지칠 때쯤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정착은 정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동네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남은 삶의 제한을 뜻하는 것일까. 자기 합리화를 위해 스스로 질문해 본다. 경험해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아전인수 격의 답변을 내려본다. 매일 걷는 거리도 자세히 보면 맨날 다르다. 자주 만나는 이웃과 가게도 연일 변한다. 우리 아이를 마주할 때와 같다. 시선에 애정을 담으니 단조로운 생활에서도 새로움을 느낀다. 도파민을 느리게 섭취하는 느낌이다. 조금 오그라들지만 나는 이를 정서라고 부르고 있다. 


 이 동네로 이사온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렸던 것이 기억난다.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잘한 결정이다. 우리 부부는 산을 좋아했고 자주 걸었다. 네온사인과 LED등보다는 낡은 간판과 주광색 전구를 가까이했다. 우리가 가진 기호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세상에 없던 아이가 집에 찾아왔다. 셋이서 걸으니 더 즐겁다. 아이가 앞으로 어디서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동네와 시간이 든든한 노스탤지어가 되길 소망한다. 우리 부부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와 함께 젊은 부부로 살아가는 이 시절이 그림처럼 남아주길 바란다.





240422(월) : 하원을 하고, 놀이터에서 한 시간 넘게 놀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240423(화) : 어린이집에 가자마자 신났다. 앉아서 아빠를 배웅했다. 까루나에 가서 포틀럭 파티를 참석했다.

240424(수) : 어린이집 문 앞까지 나와서 아빠를 배웅했다. 아빠와 경복궁에 다녀왔다. 아빠의 오랜 단골인 쏘리에스프레소에도 들렀다.

240425(목) : 오늘도 웃으며 아빠를 배웅했다. 반차를 낸 엄마를 만나서 무척 즐거웠다. 집에 가는 길에 래인 카페에 들렀다. 엄마가 온라인 미팅을 하는 동안 아빠와 놀이터에서 놀았다.

240426(금) : 하원을 하고 아빠와 홍연길에 다녀왔다. 시네마치킨에 들러 아빠가 생맥주(아빠 물)를 마시는 걸 구경했다. 마켓까놀레에서 디저트도 사 왔다.

240427(토) : 아빠 엄마와 또 과천 서울 대공원에 갔다. 어린이 미술관에 들렀다. 남양주 이모집으로 가서 사촌오빠들과 재밌게 놀다 왔다.

240428(일) : 아침부터 엄마아빠와 연희동을 산책했다. 비전스트롤에 가서 모닝커피 내리는 걸 구경했다. 오후에는 코드시브에 걸어갔다.




우리는 이 산책길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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