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육아 : 240429-240505
지옥으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고, 바닥이 부드러우며, 갑작스러운 굴곡과 이정표와 표지판이 없는 완만한 길이다. 그 길은 결코 벼랑이 아니고,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간다. (C. S. Lewis,『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각색, 1942)
‘급기야’라는 단어를 꼭 쓰고 싶다. 급기야 머리에 노란 물까지 들였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 멜라닌 색소를 추출해냈다. 인생 첫 탈색이다. 친구들은 나이 먹고 객기를 부린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단호했다. 휴직 기간 해보고 싶은 중요한 숙원 사업 중 하나였다. 타성에 완만히 젖고 있다고 자각한 몇 년 전부터 다짐한 일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외모라도 정반대로 바꿔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름 절박하고 간절했다.
다만, 일필휘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처음엔 뒷 머리만 탈색을 했다. 탈모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귀 부분만 염색한 강아지(이름은 왠지 메리나 쫑 혹은 코코) 같았다. 옆머리까지 올려 보았다. 복직할 때 잘라 버리고 아이비리그 컷을 해버리면 되니까. 그렇게 갓파요괴가 되었다. 세 번째로 미용실을 방문했을 때는 민망해서 식은땀이 났다. “제가 말했었잖아요..”라는 말을 대여섯 번 들으며 드디어 머리 전체를 노랗게 만들었다. 거울 앞엔 뽕짝 가수가 앉아있었다. 다행인 건 아이가 깔깔대며 좋아한다. 신기한지 매일같이 내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하루면 될 일을 한 달에 걸쳐 진행시키는 나를 천천히 지켜보며 참 나답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겐 간단한 일탈일 텐데(일탈도 아닐 텐데), 그마저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야만 하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나는 언제쯤 나를 괴롭히는 ‘기대감’이라는 단어를 뿌리칠 수 있을지 자조했다. 뭐, 중요한 건 그래도 했다는 사실. 나는 결국 탈색을 했다. 그러고 보면 육아휴직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을 질질 끌고 이것저것 읽어보고 난리를 쳤지만 기어이 이 시간을 만들어냈다.
반면 나는 열두 살은커녕 오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뭐 어때. 나는 나대로의 삶이 있는 거잖아. 난 비록 아직도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찾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내 삶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모습이 되길 바라는 이 마음이 도무지 식지를 않는다는 게 좋아. 스스로 조금 대견한 기분이랄까. 세월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해서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게 말야. (이석원, 『2인조』, 2020)
탈색했다고 해서 타고난 성정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확신한다. 있는 힘을 다해 불량해지고 싶었지만 여전히 쭈굴대는 내가 증거다. 행색은 폭주꽤나 뛰어본 나고야 지방의 양키 아저씨 같지만, 실상은 제한속도 주행을 고수하며 하이빔 세례를 받는다. 오히려 조금 불편해졌다. 관공서, 은행, 공항에서 보다 철저한 신분 확인을 요구한다. 어디서나 선입견에 근거한 응대를 받는다. 그래도 단계적으로 겪으니 덜 당황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회의 하대를 즐긴다. 기대감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덕분에 언제든 내 속도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내가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보통의 사람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기 전에 화강암인지 검색까지 해보는 게 내 성격이라면 그렇게 가는 게 맞다. 작은 선택 하나하나 꼼꼼하게 꿰어내고 싶다. 나답게 사는 일에 효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 배나 비싼 가격으로 완성한 내 노란 머리도 세 배 강렬한 경험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뽕짝의 진한 가사처럼 그렇게.
240429(월) : 등원하기 전에 아빠와 집 앞의 산에 다녀왔다. 아빠는 어린이집 출석카드 대신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카드를 가지고 나와 한참을 같이 웃었다. 하원하고선 티치에 갔다. 아빠가 맥주를 마시면서 주스를 사주었다. 집에 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놀이터에 들렀다.
240430(화) : 등원 전에 아빠와 등산을 했다. 방죽에서 오리를 만나서 놀랐다. 날아온 걸까. 어린이집에서 넘어져 이마를 찧었다. 아빠와 바로 병원에 갔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일찍 퇴근한 엄마와 다시 어린이집에 가서 선생님을 만났다.
240501(수) : 엄마, 아빠가 둘 다 집에 있는 근로자의 날. 연희동 그레인서울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오후에는 성수동에 갔다. 무비랜드를 구경하고 부산밀면집에서 만두를 얻어먹었다.
240502(목) : 아빠와 집부터 어린이집까지 쭉 걸어서 등원을 했다. 하원하고서도 놀이터에서 한참 놀았다.
240503(금) : 아빠와 또 등산, 어린이날 행사로 아빠와 같이 어린이집에서 놀았다. 퇴근하는 엄마와 홍연길에서 만났다. 열린 공간 연희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고, 근처에서 족발을 사 왔다.
240504(토) : 아침에 홍제천 산책을 하다가 모래내설렁탕에서 가족식사를 했다. 잠이든 채로 미크커피에 같이 갔다. 폭포마당에서 어린이날 행사도 구경했다.
240505(일) : 하루종일 비가 오는 날, 꽃 그리는 아이에서 놀다가 둘리네 집에 놀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