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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Jul 24. 2024

육아휴직 11주 차 : 놀고 앉아있다

아빠 육아 : 240408-240414



 지울 수 없는 강도로 행복감을 새겨놓은 시절이 세 번 정도 있었다. 아이들을 먼지 나게 팼던 담임 선생님에 대항하여 학급원 모두가 똘똘 뭉쳤던 초6 레지스탕스 시절. 처음 상경해서 모든 것이 새로웠던 스무 살 시골쥐 시절. 정말 없는 영혼까지 다 끌어모아 신명 나게 허세를 부려댔던 어학연수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시절. 공통점은 한 가지였다. 행복의 정의 따위는 당연히 잘 모르지만, 자기 전날 다음 날이 기대되던 시기였다. 감사하게도 그에 준하는 시기가 요즘이라 여기고 있다.


 일단 아이 입술의 회복 속도가 빠르다. 상처가 안쪽이라 다행이기도 하다. 잇몸이나 치아도 괜찮은 것 같아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다. 어린이집도 많이 편안해진 모양이다. 등원길 심기가 이제는 불편하지 않아 보인다. 요즘은 손을 잡고 조금씩 걸어보고 있다. 새 지저귐 소리를 들으며 꽃도 구경하며 거니는 시간이 감동적이다. 등원을 시키고 나면 혼자 어떤 카페를 갈지 고민해 본다. 기분에 끌리는 곳에 가서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는다. 그마저도 피곤하면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마음속의 오래된 필터를 갈아 끼고 있다. 나 역시 치유 중인 셈이다.


 하원 길에는 졸려하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온다. FM라디오를 작게 튼다. 아기띠를 한 채로 청소기를 돌린다. 아이는 이내 낮잠에 든다. 순두부 다루듯 침대에 조용히 내려놓고 캣워킹을 하며 거실로 나간다. 고양이처럼 그렇게 일광욕을 한다. 아이가 일어나면 산책을 떠난다. 연희동으로, 홍제천으로, 서촌으로. 미리 검색해 둔 전시를 보거나 가벼운 장을 본다. 퇴근하는 아내를 소환한다. 같이 저녁을 먹고 귀가한다. 칼 말론과 존 스탁턴(강민경과 이해리)에 버금가는 콤비호흡으로 아이를 씻기고 재운다. 맥주 한 캔을 조용히 딴 채로 아내와 하루를 공유한다. 그러다 바깥양반이 먼저 취침에 들면 나는 혼자 방으로 들어가 일기를 쓴다.


 단조롭고 무용한 나날들이다. 한 마디로 돈벌이와 관련된 활동은 전무하다(물론 가사노동이나 육아도 기회비용 측면에서 가치를 창출하지만 논외로 한다). 그럼에도 풍족한 기분을 느낀다. 역설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기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 었다. 실컷 놂으로써 생각의 불순물은 걸러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쌓아간다. 잠을 자는 동안 키가 크는 것처럼 마음이 성장함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타고난 한량일지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뭔가 내 안에서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꼭 취직을 하고 통장잔고가 늘어야 발전한 거니. (드라마,『메리대구 공방전 1회, MBC』, 2007)




 사실 모두가 놀고 싶다. 근면이 미덕인건 맞지만 노는 것이 죄악시될 필요는 없다. 물론 육아라는 명분으로 죄책감을 덜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도 아침잠을 쫓아가며 출근한 아내 덕에 불안함을 덜어낸 면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기회를 통해 ‘논다’라는 단어의 부정적 뉘앙스를 내 마음속에서 걷어내고 싶다. 열일하는 부자가 아닌 사람(때로는 나를 포함한 유형)을 게으르고 한심하다고 여긴 적이 있다.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며 결과론적인 생각은 아니었을까. 시간의 주인이 되어 존재만으로 풍요로워질 순 없을까. 일단 아이와 놀면서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욕망에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놀고 싶으면 놀아야지. 명분은 그다음에 찾자. 그렇게 놀면서 찾은 명분은 바로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한 잠깐의 방황’이었다. (하완,『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2018)





240408(월) : 어린이집 가기 전에 콧물감기로 병원에 들렀다. 저녁에는 엄마의 회사 동료들과 베지스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240409(화) : 까루나 포틀럭파티에 참석했다. 저녁엔 엄마 친구들이 집으로 모였다. 리아 언니와 은우 언니도 와서 꽃 그리는 아이에서 신나게 수영하며 놀았다.

240410(수) : 엄마 친구 가족들과 집 근처에서 놀았다. 홍제천을 산책하고 신기한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도 했다. 저녁엔 당근마켓 거래 현장에 동행했다.

240411(목) : 어린이집 하원을 하고 아빠와 홍연길 카페(배추공주와 페키들의 감성놀이터)에 다녀왔다. 

240412(금) : 아빠와 홍연길 갤러리(연희 아트페어) 관람을 했다.

240413(토) :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여행을 갔다. 아빠의 회사동료 가족(로담 언니)을 만났다. 대전 어린이수목원도 가고 오성칼국수에서 밥을 먹었다. 

240414(일) : 아침에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한빛탑도 보고 성심당에도 갔다. 대전 한화 이글스파크에서 인생 처음으로 야구경기도 관람했다. 저녁엔 태화장이라는 유명한 중국집에 들렀다. 잠이 든 채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로 같이 놀아주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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