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 후 정확히 세 번째로 입사한 회사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따지고 보면 회사가 아니라 산부인과라 평화를 논하기엔 수술과 출산, 입원이 일상인 곳이었으나 원무과에 딸려있는 작은 부서의 디자인직으로 입사한 나는 그런 일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내가 속한 부서의 사무실은 산모님들이 출산 전 요가나 십자수 클래스를 수강하는 강당 옆 창고를 개조한 곳이었다. 때문에 협소한 공간에 세 개의 책상과 세 명의 사람이 밀접하게 붙어있었지만 입사 전 이래저래 많은 일을 겪었던 나로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환경이었다. 오히려 좁고 빈틈없는 그 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지기까지 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하는 업무는 소소했다. 입사 전 배워온 디자인 프로그램을 이용해 원내에 게시될 포스터나 안내문을 만들고, 가끔 병원 행사가 있는 날이면 행사 현수막이나 배너를 제작했다. 웬만해선 사무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지만 가끔씩 온 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료 스케줄표를 변경하거나 포스터를 새롭게 바꾸기도 하였다. 품 안에 인쇄소에서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포스터와 양면테이프를 들고 외래, 병동, 분만실, 신생아실을 차례로 돌다 보면 그 시간이 번거로우면서도 꽤나 평화롭게 느껴졌다. 원내에 있는 대다수가 출산을 앞둔 산모였기 때문에 병원은 어딜 가도 따뜻했고,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특히 신생아실에 갈 때면 곤히 잠든 아기에게서 참 좋은 냄새가 났다.
그날은 내가 산부인과에 입사한 지 2년이 가까워질 시기였다. 어김없이 새로운 포스터를 품에 안고 병동 복도로 들어섰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내 일상이 너무 평온한 것이다. 취업해서 번 돈으로 만화를 배우겠다는 다짐으로 상경했는데 나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 않았다. 상경하자마자 입사한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두 번째로 이직한 회사에서 임금체불을 경험하다 보니 근 2년간 온 정신을 '안정'에 쏟고 있던 탓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통장에 3만 원만 남아서 주변에 손 벌리는 일은 없게 할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병원 사무직은 안정을 찾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매달 월급날에 맞춰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고, 해가 지나면 연봉이 찔끔 오르고, 문화센터 강당을 지나 사무실로 출근하면 주변은 늘 조용했으니까. 스케쥴러를 펴고 그날 할 일을 체크하며 업무를 시작하면 강당에서 명상을 위해 틀어둔 잔잔한 음악이 이따금씩 들려올 뿐이었다.
평화로웠다. 지나칠 정도로. 이대로 가다간 내가 딛고 있는 병동의 따뜻한 온돌 바닥처럼 계속 이곳에 들러붙고 싶어질 것 같았다. 비전도 미래도 없이 그저 평온하기만 한 이곳에.
결국 시간을 들여 고민한 끝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사라니 말도 안 되는 치기였지만 당시에는 그 길이 두말할 것 없는 정답으로 여겨졌다. 당장 나를 병원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나는 영영 모 산부인과에서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는 직원으로 남았을 테니까. 뭐든 그때의 내가 내린 결정이 가장 옳은 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