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어떤 일'에 대해
생의 비명을 오래 들어줄 사람은 없다. 언젠간 모두 귀를 막고 돌아서기 마련이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떤 일은 사람을 바꿔놓'고 그 '어떤 일'은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이 된다.
옅어지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절망인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알고 있으며, 매 순간 비명을 지르며 살아왔다. 그 고통을 나누고, 네가 그의 절반만이라도 옮겨주길 바랐다. 귀를 막고 돌아서는 너를 비난하며, 기어가듯 보낸 몇 년. 어느 순간부터 그 일은 나에게 날이 선 무기가 되었다. 날카로운 뱀의 혀를 가진 나는 너를 찌르는 대신에 나의 입천장을 찢어 보여줬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가득 피를 물고 이야기했다. 병신처럼.
근데, 가장 웃긴 건 나와 내 동생, 어머니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존재마저 되지 못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질척거렸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한심하게도.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의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절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을 비난할 것도 아니며, 그 사랑하는 이들을 붙잡고 하소연했던 우리를 자책할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일'이 초래하는 삶의 방식은 절대 맞닿을 수 없는 어떤 평행선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를 현재의 세계와 다른 선상에 놓아버린다. 함께 같은 선을 달리다 '어떤 일'이 만들어 놓은 생의 점프대에 올라서는 아예 다른 층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트랙에 서서 서로의 삶을 비교하며, 보여주며 누구의 삶이 더 옳은가, 누구의 삶이 더 비극인가에 대해 논했다. 그것들은 모두 소비적이며, 감정적인 것이어서 입천장에서 흐른 피는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그 시간 동안 흐른 피들을 모아서 보여주려 애쓰는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우리는 늘 그래왔다. '굳이 고된 나를 택할 그대'를 기다리며 살아왔지만, 그의 가사처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삶의 새로운 층위를 이해해야 한다. 흐르는 피를 닦고 달라진 삶에 대한 고민은 우리에게 닥쳤던 '어떤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