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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si Jul 25. 2017

나를 부를 때

성준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성준아'라는 애정 어린 발음이 나올 때마다, 나는 찰나의 감탄과 함께 발끝이 따스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해.'라는 무언의 확정.
 하지만 어린 마음에 나는 내 성인 '방'을 붙여 '방성준'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방 씨라는 성이 가진 무차별적 놀림 때문이었다. 방구(방구보다 싫은 별명은 방귀였다.), 방뎅이, 방구준, 뿡뿡이 등. 지금 들으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 시절 나는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그래서 엄마 말에 따르면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느 날, 엄마 앞에 서서 내 이름을 '성.준.이'라고 바꿔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름이 세 글자여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성은 '성'이 되는 거고 이름은 '준이'가 되는 세련된 이름으로 말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름이다. 뭐, 어쨌건 '방 씨'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겨우 유치원 다녀온 꼬마가 한다는 소리가 이름을 바꿔 달라는 것이라니, 참. 그래서인지 나는 '성준아'라고 불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때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아주 작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서야 별명들은 내게 애칭으로 인지되기도 했지만)
 정성 '성'에 밝을 '준'. 한자 시간에 전화기 넘어 아빠의 목소리로 들은 이름의 뜻도 너무나 좋았다. '한자? 정성 '성'에 밝을 '준' 이야. 아, 정성 '성'은 말씀 '언' 변에 이룰 '성'이고 '준'은 날 '일'에 준걸 '준' 매일 준걸하다라는 뜻이지' 그 무렵 한자 공부를 조금 해놓은 탓에 무리 없이 한자들을 조합해서 이름을 만들었다. 말한 것을 이루는 정성 '성'과 해가 진실하게 가듯 밝을 '준'. 그래서 중학생 때 사용한 모든 공책에는 나의 한자 이름이 쓰여있다. 왠지 조금 더 큰 일을 해도 될 것 같은 '성준'이라는 이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발음 자체의 따스함이다. <희랍어 시간>의 한강 작가처럼 '숲'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멋들어지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아'라는 발음이 떨어지는 순간, 느껴지는 그 따스함을 사랑한다. 내 이름을 말할 때 닫히지 않는 그들의 입과 그를 통해 나오는 애정. 나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다. 나를 부르던 너의 모습과 선생님들 엄마와 아빠, 이모의 모습들까지 내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계속해서 쌓이는 그 따스함.

 오늘 은행에 갔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아가씨를 봤다. '성준아'.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꼬마 아이가 뛰어다니고 있었고 내 또래인 아가씨는 그 친구의 이름을 성준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윤성준!'이라 불렀을 때, 그 꼬마가 괜스레 부러워졌던 이유는 그 꼬마가 방 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웃기긴 하지만 오랜만에 그 따스함을 느낀다. 정말 오래도록 불리지 않은 이름 같다. 아들, 빵상, 빵, 성준이 형, 선배, 형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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