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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si Jun 29. 2018

하루를 기록하는 일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

 얼마 전, 박준 시인의 시집을 사려다가 우연히 북 토크 소식을 접하고는 오늘 성북구 어느 카페로 시인을 만나고 왔다. 그의 문장에서 사려와 따듯함이 느껴졌다면, 실제로 만난 시인은 위트와 영특함이 톡톡 튀었다. 거의 습관처럼 머리를 긁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시인. 그는 정말로 말을 재미있게 했는데, 때때로 '시인 버튼'이 눌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당혹스러운 '시인의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는 좌중을 압도했다. 그 밖에도 시인은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해서,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개인적으로 그 중 일기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오래 남는다.
 시인은 다른 시인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며 '99%가 책을 좋아해서 시인이 됐어요.'라는 다소 상투적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1%의 반례가 본인이라며, 정말 책을 많이 안 읽고 자란 케이스라고 소개했다. 그 대신에 시인은 일기를 자주 쓰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물론, 강압적인 고등학교의 방침) 그 일기를 쓰는 습관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시인이 직접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일기를 쓰는 습관이 현재 본인의 업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인은 계속 일기를 쓰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정성에 대해 말을 눌러가며 강조했다. (사실, 정확한 몇 개의 단어로 글의 속성을 얘기하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나는 진정성, 하나는 보편성, 하나는 미학성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일기를 쓰는 순간과 썼던 글. 그리고 그 순간들의 내 모습을 기억해냈다. 시인은 '오늘은 어제와 같았다.'라는 문장을 써 보라고 했고, 이어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라고 쓰게 했다. 뱉어내며 소멸하는 말과 다르게 기록되며 채워지는 글의 힘. 그리고 쓰며 다른 이에게 입력된 감정들을 글로써 출력해 내는 것. 시인의 모든 말에 공감했다.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라고 쓰고 마침표를 쓰는 순간, 나는 한 선배가 생각났는데, 키가 작고 눈이 깊은 선배의 모습이 스쳤다. 선배가 첫인사로 써 주었던 글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아마 그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나서 반가워요. 웃음이 예쁜 후배' 지금 보면 굉장히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나는 종종 그 글을 펼쳐보기도 했다. 선배는 글을 굉장히 잘 썼고, 1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시절 싸이월드 일기장에 본인의 감정을 가감없이 써 내려가곤 했다. 늘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유려한 글. 선배의 글에는 힘이 있어서 나는 길게 쓰인 일기장을 오래도록 훔쳐보곤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선배를 좋아했다기 보다 동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나도 선배를 따라 길게 글을 써보기 시작했고, 새로운 페이지를 자꾸 열어보곤 했으니까. 늘 막막한 흰 페이지 앞에 서서, 시인처럼 머리를 긁으며 짧은 탄식을 뱉곤 했다. 다행히 아직 그때의 동경이 나를 종종 쓰게 한다.
 시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선배의 소식을 찾아봤다. 이제는 다른 분야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좋은 이야기로 사랑받는 작가가 되어있다. 삶에 대해 이야기하던 글과 단락을 나누며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던 글. 그리고 선배가 사랑하던 사람이 참 부러웠던 시절의 글도 기억한다. 한 폴더는 선배의 남자친구 이름으로 되어있었는데, '언젠가 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매일 쓸 수 있는 폴더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나에게도 계속 이 습관이 남아 소멸하지 않고, 기록되는 삶이길 바라며. 괜히 선배에게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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