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과일시장을 떠난 이유
전국 단위로 서비스를 확장한 이후,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흘러갔다.
동탄지역 직배송과 전국배송을 위한 포장을 격일로 단위로 진행했다.
우리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이어가며 배송과 고객 응대에 매달렸다.
해가 뜰 때면 포장과 배송을 마치고 지친 몸을 눕혔고, 달이 뜨면 다시 사무실에 불을 밝히는 일이 반복됐다.
매일매일 몸은 고됬지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고민이 시작됐다.
우리에게 사무실을 빌려주고 우리 팀을 좋게 봐준 벤처캐피털(VC)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은 것이다.
사실, 배송을 하고 포장을 하는 일을 언제까지고 직접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스케일업을 위해서는 투자유치가 필요했었다. 투자 제안을 받고 사업이 점점 확장되면서 이 일의 비전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이 업(業)에 대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과일이라는 품목 특성상 제품 자체에 할 수 있는 개선과 발전의 영역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품종을 직접 개발하거나 교배하는 연구를 하지 않는 이상, 제품 자체를 더 좋게 만드는 것은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다. 물론 좋은 품질의 과일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는 것도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제품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기획과 개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점점 아쉬움으로 남았다.
또, 글로벌 시장을 바라본 나에게 과일 유통업은 확장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과일 유통업의 최종 목표는 결국 국내 과일 유통시장에서의 평정이었다.
국내 시장에서의 성공도 의미가 있지만, 나는 글로벌한 사업을 하고 싶었다.
물론 다른 사업 영역을 추가로 개척할 수도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과일 사업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일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더욱 확장 가능성이 높은 사업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반복해서 들었다.
단골 고객이 늘어나고, VC에서 투자 제안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허전함과 공허함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투자 제안서의 숫자와 미팅에서 들은 칭찬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이 울렸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정말 이 일에 열정이 있는 걸까?'
동시에 이런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
혹시 몸이 힘들어서 단지 회피성으로 이런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애초에 내가 사업과 맞지 않는 사람인지 냉정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한번 고민이 시작되자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고객과 소통할 때나 다음 전략을 구상할 때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머뭇거린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결국 고민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팀원들에게 내 상태를 공유했다.
팀원들에게 제대로 된 리더 역할을 하려면 명확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이렇게 갈팡질팡한 상태로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팀원들에게 피해만 줄 뿐이었다.
고맙게도 팀원들은 내 상황을 이해하며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이 일을 진지하게 되돌아보았다.
하루하루 고민하면서 내가 처음 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떠올려봤다.
당시에는 무언가를 빠르게 실행하고 내 사업을 일으켜보겠다는 의지만 강했다.
그렇기에 돈이 될만한 사업을 찾고 그 사업의 선두주라를 빠르게 모방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업 아이템에 대한 내 열정이 어떤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배부른 소리.'
'그냥 돈이 될 만한 일을 하는 게 사업이다.'
맞는 말이다. 일부는.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사업에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따른다. 그렇기에 본인이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해야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과일유통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뒤돌아봤을 때 후회가 안남을 정도로 이 사업에 내 열정을 태울 수 있을까?
나를 믿고 따라주는 팀원들과 투자자들.
투자를 받게 되면 책임의 무게는 더 커질 것이고, 그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일주일간의 깊은 고민과 성찰 끝에 나는 이 일을 그만하기로 결정했다.
결정을 내린 후 팀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할 때 마음이 무거웠지만, 고맙게도 팀원들은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오히려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겠다며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8명이라는 적지 않은 팀원들을 이끌며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나로서는 그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다.
투자자에게도 내 결정을 공유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전할 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업이 내 삶에 진정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점,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기에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성공'은 외형적인 성취만이 아니었다.
일을 하는 과정 중에도 스스로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내 열정이 향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지나친 바쁨과 맹목적인 성공을 향한 과정 속에서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 나는 어떤 일에 열정을 느끼는가?
- 그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한가?
- '사업'이라는 겉멋에 빠진 것은 아닌가?
-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건가?
과일사업에 대한 고민을 끝내고 나니 삶의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뒤따라 생겨났다.
확고한 줄 알았던 내 가치관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그날 바로 '발리'로 떠났다.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삶의 나침반을 찾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