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삶을 대하는 자세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친구들의 연락, 가족의 시선, 익숙한 거리와 습관이 만들어낸 관성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의 기대도, 방해도 닿지 않는 완전한 고립. 그렇게 나는 한 달 살기를 결심했고, 날씨가 좋고 안전하며 디지털 노마드들이 모인다는 이유로 발리를 골랐다.
발리는 소문대로 천국 같았다.
약간 더운 것만 빼면 하늘은 매일 투명했고, 석양은 숨을 멎게 했다.
붉은빛이 바다를 건너오면, 모래 위를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한 편의 움직이는 그림이 되었다.
나는 하루에 한 번쯤 스쿠터를 타고 지도에 찍어둔 곳을 향해 달렸다.
논과 사원, 조용한 골목과 북적이는 관광지를 지나며 잠깐씩 멈추어 서는 시간들이 내 하루의 쉼표가 되었고 숙소에 돌아오면 수영을 하고, 젖은 머리로 썬베드에 누워 책을 펼쳤다.
발리에 오기 전부터 붙들고 있던 질문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답을 얻고 싶어 가져온,
니체에 관한 책이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삶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해 고민을 했었는데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답이 안 나오던 끝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들의 끝판왕이 철학자, 또는 종교인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각종 철학 사상과 종교를 뒤져봤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공자, 쇼펜하우어 등등 여러 종교와 철학 사상들을 흝어보던 중 니체의 철학이 내 눈길을 끌었다.
니체에 대해 내가 아는 문장은 하나뿐이었다.
“신은 죽었다.”
막상 읽어보니 그 말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오래된 권위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무엇을 믿고 살아갈지, 어떤 가치 위에 삶을 세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니체의 철학을 접하고 의미를 곱씹을수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책을 읽었고 이해가 걸리는 문장은 유튜브와 검색으로 보완했다.
발산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거 같을 때면 책을 덮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수영하고, 다시 읽는 날들이 이어졌다.
니체가 남긴 많은 사유 중에서도 특히 내게 강한 공감과 인상을 남긴 것은 세 가지였다.
- 관점주의
- 초인(위버멘쉬)
- 영원회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을 생각이지만 니체는 그 생각을 치열한 삶과 날카로운 사고로 명료하게 다듬어 냈고 니체의 글은 항상 구름 속에서 헤매는 듯한 생각으로 끝나던 나를 구름 밖으로 끄집어내어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사유를 안고 발리의 일상을 바라보니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가진 것이 없어도 매일 아침 힌두 신에게 공양을 올리는 '카낭 사리'
새벽 별이 쏟아지던 시간에 자신의 꿈을 들려주던 현지 가이드,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아이들.
나는 그동안 내 삶을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선택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타인의 기대와 정해진 환경, 익숙한 관성에 기대어 편한 관점만 골라 쓰며 살아온 때가 많았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 모습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민의 방향을 무엇으로 해야 될지는 확실해졌다.
발리에서 내가 만난 철학자는 니체 한 사람이 아니었다.
길가에 겹겹이 쌓인 꽃바구니였고, 저녁노을에 길어진 그림자였고, 내 안의 목소리였다.
신이 죽은 시대에, 나를 이끄는 신은 내가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