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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물감통

by 김경훈

보랏빛 노을이 호수 위로 부드럽게 번져가는 늦은 오후, 언덕 위 작은 화실 앞에는 리트리버 탱고가 앞발을 정갈하게 모으고 앉아 있었습니다.

탱고는 화실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붓질 소리와, 늙은 손이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죠.


그곳에는 77세에 은퇴하여 노인정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여든한 살에 처음 붓을 든 '해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뒤늦게 발견한 재능으로 백 살이 넘어서도 개인전을 열며 세상을 놀라게 했죠.

그 옆방에는 아흔다섯의 나이에 어학 공부를 시작한 '석규' 박사가 돋보기를 치켜세우고 단어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두 어르신이 잠시 쉬며 "우리가 너무 늦게 시작한 건 아닐까?" 하고 서로에게 물을 때, 탱고가 천천히 일어나 그들 사이로 다가갔습니다.

탱고의 목소리는 잘 익은 포도주처럼 깊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습니다.


"해리, 석규 어르신.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없어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곤 하죠. 하지만 그런 말들은 앞으로 인생에 찾아올 수많은 선물 상자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것과 같아요. 인생이라는 도화지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뿐,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그 위에 어떤 색을 칠하느냐뿐이랍니다."


해리가 붓을 닦으며 웃자, 탱고가 꼬리를 흔들며 덧붙였습니다.


"석규 어르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65세에 늙었다고 생각하며 포기했다면 그 후의 30년은 비통한 후회로 남았을 거예요. 하지만 95세에 다시 어학 공부를 시작한 건, 10년 뒤 105번째 생일에 '그때 왜 안 했을까'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죠. 지금 이 순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면, 당신의 도화지는 다시 새하얀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마법이 일어난답니다."


탱고는 화실 창밖으로 펼쳐진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지막 지혜를 건넸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결코 없어요. 다만 '너무 늦었다'고 믿는 마음이 우리를 멈춰 세울 뿐이죠. 정신이 또렷하고 가슴이 뛰고 있다면, 오늘이 바로 당신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자 새로운 걸작을 시작하기에 가장 완벽한 날이에요. 자, 이제 다시 붓을 들고 책을 펼치세요. 당신의 물감통은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까요."


해리는 다시 화려한 색채를 캔버스에 담았고, 석규 박사는 낯선 외국어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탱고는 다시 평화롭게 자리에 누웠습니다.

노년의 화실은 이제 저물어가는 해의 마침표가 아니라,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는 생생한 서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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