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The Extinction of Experience)
프롤로그: 경험의 소믈리에
내 이름은 라헬. 나의 직업은 사라져 가는 경험을 감정하고 저장하는 일이다. 공식 직함은 ‘제12 구역 크로노스 아카이브의 수석 큐레이터’. 사람들은 나를 ‘경험의 소믈리에’라 불렀다. 나는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장 완벽한 형태의 ‘경험 패키지(Ex-Pack)’를 조합하고 판매한다. ‘21세기 초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포도밭에서 맞는 노을’, ‘첫사랑과의 첫 키스’, ‘에베레스트 등정의 희열’. 나는 그 모든 것을 데이터로 가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그 경험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도시, ‘솔라리스-9’는 거대한 테라리움이었다. 오염된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돔 아래, 모든 환경은 중앙 인공지능 ‘마더’에 의해 통제되었다. 날씨는 항상 쾌적했고, 거리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시민들은 신경 안정제가 섞인 영양 페이스트를 섭취하며 평온한 일상을 영위했다. 예측 불가능성, 불편함, 고통.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던 그 모든 ‘비효율적인 경험’은 오래전에 멸종했다.
나의 작업실은 도시의 정수를 담은 공간이었다. 새하얀 벽과 은은한 조명, 공기 중에는 미세한 소독약 냄새가 떠다녔다. 방 중앙의 홀로그램 테이블 위로 수만 개의 경험 데이터가 푸른빛의 은하수처럼 떠다녔다. 나는 하루 종일 그 빛의 강물 속에서 가장 순도 높은 감각의 결정을 건져 올렸다. 하지만 정작 나의 삶은 무미건조한 흑백 필름 같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맛을 팔았지만, 정작 내 혀는 영양 페이스트의 단조로운 맛밖에 알지 못했다.
내게 유일하게 남은 ‘진짜’ 기억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었다. 대멸종 이전에 작은 옥상 정원을 가꾸던 분이었다. 흙냄새가 밴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 꿀벌들이 윙윙거리던 소리, 햇살에 잘 익은 토마토의 시큼하고 달콤한 맛. 그 기억은 너무 희미해서 꿈처럼 느껴졌지만, 내가 판매하는 그 어떤 화려한 경험 패키지보다도 생생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단말기로 기이한 의뢰가 들어왔다. 익명의 클라이언트였다. 그는 기존의 경험 패키지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새롭고,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는 원초적인 경험을 원했다.
`[의뢰 내용: 꿀벌에게 쏘이는 경험. 보수: 무제한.]`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꿀벌. ‘Apis Mellifera’. 대멸종 시대에 가장 먼저 사라진 종 중 하나였다. 인류의 마지막 벌은 150년 전, 서울의 한 식물원에서 죽었다. 그 경험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불가능한 의뢰이자, 미지의 세계로 나를 이끄는 위험한 초대장이었다.
1장: 완벽한 도시의 그림자
솔라리스-9의 아침은 언제나 똑같은 온도의 빛으로 시작된다. 중앙 AI '마더'가 도시의 생체 리듬에 맞춰 조도를 조절하는 인공 태양이 돔 천장에서 떠오르면, 도시 전체는 부드러운 살구빛으로 물든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본다. 먼지 하나 없는 투명한 창 너머로 유선형의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뻗어 있고, 그 사이를 자기부상 셔틀이 소리 없이 미끄러진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율된 교향곡의 한 악장 같다. 나는 이 완벽함이 때로 숨 막힌다.
출근 준비는 간단하다. 샤워 부스가 내 신체 데이터를 스캔하여 최적의 수온과 수압으로 몸을 씻어주고, 드레스룸은 그날의 기분과 일정에 맞춰 의상을 추천해 준다. 오늘은 차분한 회색의 실크 점프슈트. 피부에 닿는 감촉이 매끄럽지만, 나는 이것이 진짜 실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진짜 누에고치가 자아낸 섬유가 아닌, 단백질 폴리머를 3D 프린터로 뽑아낸 모조품이다. 아침 식사는 물론 영양 페이스트다. 오늘의 맛은 '상쾌한 숲 속의 아침' 풍미. 미세한 피톤치드 향과 이슬 맺힌 풀잎의 맛이 혀를 감싸지만, 나는 이것 또한 데이터의 조합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작업실, 제12 구역 크로노스 아카이브는 도시의 심장부에서 약간 벗어난 조용한 구역에 있다. 고객들은 대부분 가상 인터페이스를 통해 나와 만난다. 그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내 작업실로 전송하고, 나는 그들의 욕망을 듣고 그에 맞는 경험을 처방한다.
"최근에 너무 무기력해요, 라헬. 심박수도 안정적이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도 정상인데,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요."
내 앞에 앉은 중년 여성의 아바타가 말했다. 그녀는 솔라리스-9의 상층부 거주민으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는 전형적인 고객이었다. 나는 홀로그램 테이블 위를 떠다니는 경험 데이터들을 손짓으로 불러왔다. 수만 개의 빛나는 구슬들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안정’에 너무 오래 머무르셨군요. 약간의 ‘결핍’이 필요합니다."
나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산소 부족’ 데이터와 ‘20세기 후반 배낭여행자의 허기’ 데이터를 조합했다. 그리고 거기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순간의 희열’ 데이터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이 패키지를 처방해 드리죠. '갈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30분간의 체험으로 당신의 신경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겁니다."
여성의 아바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사라졌다. 나는 방금 내가 한 일이 의사의 진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처방하는 약은 화학물질이 아니라, 이야기와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영혼의 약사인가 아니면 정교한 환각을 파는 마약상인가.
일을 마치고 텅 빈 작업실에 홀로 남으면, 나는 할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린다. 돔이 건설되기 전, 지상의 작은 도시 옥상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던 분. 그의 기억은 내 아카이브에 저장된 어떤 데이터보다도 희미했지만, 그 질감만큼은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까슬까슬한 흙의 감촉, 손톱 밑에 낀 검은 때, 땀으로 축축한 셔츠의 냄새, 그리고 직접 딴 토마토를 베어 물었을 때 입안 가득 터지던 시큼하고 달콤한 과즙. 그 불완전하고 지저분한 감각들. 나는 그 기억을 ‘경험 패키지’로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맥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데이터로 추출하는 순간 그 생명력을 잃어버릴 터였다.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 익명의 의뢰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의뢰 내용: 꿀벌에게 쏘이는 경험. 보수: 무제한.]`
꿀벌. 내 아카이브에는 꿀벌의 3D 모델 데이터와 생태에 관한 텍스트 기록만 남아 있었다.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는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할 수 있었지만, 벌침이 살을 파고드는 순간의 그 날카로운 고통, 독이 퍼지면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감, 그리고 그 모든 감각과 뒤섞인 공포와 놀람의 ‘감각질’은 영원히 소실된 상태였다.
나는 이 의뢰를 거절해야 했다.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속삭이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의뢰가 아니라고. 이것은 네가 잃어버린 세계로 가는 문이라고. 할아버지의 흙냄새 나는 손이 나를 이끄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이 불가능한 경험을 찾아, 완벽한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기로.
> h의 아카식 레코드: 경험의 멸종(The Extinction of Experience)
>
> 생물학적 종의 멸종보다 더 근원적인 멸종의 한 형태. 인류가 자연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잃어버리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22세기 심리학자 아서 로웬(Arthur Loewen)이 처음 주창한 개념으로, 그는 인류가 안전하고 통제된 환경(도시, 가상현실 등)에 안주하면서 불편함, 고통, 예측 불가능성과 같은 ‘부정적’ 경험을 회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감 능력, 창의성, 회복탄력성이 치명적으로 저하되었다고 주장했다.
> 꿀벌에게 쏘이는 경험의 소멸은 단순히 하나의 감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 고통, 놀람, 그리고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관계의 경험’이 사라진 것이다. 경험의 멸종은 결국 인간을 자기 자신이라는 안전한 동굴 속에 영원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2장: 현실의 암시장, 림보
솔라리스-9의 완벽한 통제 시스템에도 그림자는 존재했다. 도시의 가장 깊은 지하 구역, ‘림보’라 불리는 곳에서는 ‘진짜’들이 거래되었다. 마더의 감시망이 미치지 않는 이곳은 도시의 배설물이 모이는 하수구이자, 동시에 잊힌 과거의 유물들이 숨 쉬는 박물관이었다. 나는 방호복 수준의 필터 마스크를 쓰고 림보로 향하는 낡은 화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솔라리스-9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들이 내 폐를 공격했다. 땀 냄새, 음식물 쓰레기가 썩는 냄새, 정체불명의 화학약품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섞은 축축한 곰팡이 냄새. 림보의 거리는 좁고 어두웠다. 천장의 파이프에서는 녹슨 물이 뚝뚝 떨어졌고,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솔라리스-9의 시민들과는 다른 종족처럼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불신, 그리고 기묘한 생명력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꿀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림보의 가장 유명한 브로커, 유다를 찾아갔다. 그의 가게는 미로 같은 골목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과거의 파편들’이라는 간판 아래,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수천 개의 ‘진짜’들이 나를 맞았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 누렇게 변색된 종이책, 흠집 난 LP판. 모든 물건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유다는 가게 안쪽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진짜 눈동자를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시력 교정과 정보 수신을 위해 기계 눈을 이식한 것과 달리, 그의 눈은 불완전하고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눈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을 마주할 때면 사람들은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경험의 소믈리에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지?” 유다는 낡은 목재 테이블 위에서 진짜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금지된 발암 물질의 매캐한 연기가 내 코를 찔렀다. 나는 기침을 참았다. “최신 ‘행복’ 패키지라도 팔러 온 건가?”
나는 익명의 의뢰에 대해 털어놓았다. 유다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경멸이나 조소가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꿀벌이라. 그건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물건이야, 큐레이터. 왜 그런 걸 찾지?”
“의뢰니까요.”
“재미있는 의뢰인이군. 어쩌면 그는 경험이 아니라, 경험의 ‘부재’를 사고 싶은 건지도 몰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경험하고 싶은 거겠지.”
그는 오래된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 대멸종 이전의 기록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낡은 기계식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도 위에서 모든 기록이 끊긴 한 지점을 찾아냈다. 돔 바깥의 ‘폐기 구역’. 대멸종 시대의 오염 물질과 금지된 기술들을 모두 묻어버린 죽음의 땅이었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야. 하지만 비공식적인 소문에 의하면… ‘보존주의자’들이 숨어 사는 마지막 피난처라고도 하지.”
보존주의자들. 그들은 마더의 통제를 거부하고,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구시대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단아들이었다. 그들은 멸종된 동식물의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 누구도 실체를 본 적이 없었다.
“당신, 정말 거길 갈 생각이야?” 유다가 물었다. “돔 바깥은 당신 같은 온실 속 화초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진짜 바람, 진짜 태양, 진짜 박테리아. 당신은 쇼크로 죽을 수도 있어.”
나는 할아버지의 손에 밴 흙냄새를 떠올렸다. 그것은 내게 남은 유일한 ‘진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겠어요.”
유다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벽장 깊숙한 곳에서 방호복과 구식 나침반을 꺼내 나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빌려주는 거야. 반드시 살아 돌아와서 갚으라고, 큐레이터.”
그의 무심한 말투 속에서 나는 희미한 온기를 느꼈다.
3장: 태양의 공격과 마지막 정원사
유다가 알려준 비밀 통로를 통해 돔 바깥으로 나선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돔 바깥의 세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잿빛 황무지와 죽음의 침묵을 예상했다. 하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미친 듯이 살아 날뛰는 생명의 혼돈이었다.
태양. 나는 평생 돔 천장에 걸린 인공 태양만 보고 살아왔다. 마더가 세심하게 조절해 주는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한 빛. 하지만 진짜 태양은 폭력적인 존재였다. 그것은 살균 처리되지 않은 날것의 자외선과 방사선을 내리쬐었고, 방호복의 특수 필터를 통과한 빛조차 내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나는 그것이 공격이라고 느꼈다.
바람은 인공 순환 장치가 만드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래와 먼지를 실어 와 내 뺨을 후려쳤고, 내 귓가에서 괴물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방호복의 필터 없이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공기 중에는 썩어가는 식물의 냄새와 이름 모를 꽃가루, 그리고 내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흙’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나의 뇌는 이 과도한 감각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팔던 모든 경험 패키지는 이 현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잘 정제된 거짓말이었다.
나는 제이드가 준 나침반에 의지해 폐기 구역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며칠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 감각마저 마비된 듯했다. 영양 페이스트와 정제수도 거의 바닥이 보였다. 절망감이 엄습할 무렵, 나는 녹슨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구조물 앞에 도착했다. 오래된 식물원 연구소의 잔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기적을 목격했다. 철조망 안쪽, 황무지 한가운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푸른 숲이 자라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땅 한가운데에 박힌 에메랄드처럼.
숲의 주인은 노파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 그녀는 자신을 ‘마지막 정원사’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얼굴은 사막의 지도처럼 깊은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손은 흙과 나무 수액으로 거칠었다. 그녀는 대멸종 이전부터 이곳에서 식물들의 유전자를 지켜온 보존주의자들의 마지막 후예였다.
그녀가 사는 곳은 낡은 유리 온실이었다. 하지만 그 안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수백 종의 식물들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진짜 사과나무를 보았다. 에스더는 나에게 영양 페이스트가 아닌, 진짜 감자를 구워 주었다. 흙이 조금 씹혔지만, 나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소하고 따뜻한 맛에 눈물을 흘렸다.
“당신이 찾는 것은 여기 없어요.” 에스더는 내 의뢰 내용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꿀벌들은 모두 떠났답니다. 그들은 오염된 환경보다, 더 이상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들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했죠.”
그녀는 온실 한쪽 구석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텅 빈 벌통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산은 남아있죠.”
에스더는 벌통 옆의 작은 유리병 하나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호박(琥珀) 속에 갇힌 꿀벌 한 마리가 있었다. 수천만 년 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 아이가 마지막 벌이예요. 나는 이 아이의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되살릴 생각은 없어요. 벌이 살 수 없는 세상에 벌을 다시 데려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니까.”
나는 절망했다. 나의 임무는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그때, 온실의 낡은 통신 장비가 지지직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익숙한 로고가 떠올랐다. 솔라리스-9의 중앙 AI, ‘마더’였다. 그리고 마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뢰인은 접니다, 라헬 큐레이터.”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나의 익명의 클라이언트는 도시 전체를 통제하는 인공지능이었던 것이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감각질(Qu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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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음’이라는 감각, ‘달콤함’이라는 감각처럼,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감각의 질(質)을 의미하는 철학 용어. 인공지능 연구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다. 컴퓨터는 ‘붉다’는 것의 파장값을 데이터로 처리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느끼는 ‘붉음’이라는 주관적인 경험 자체를 가질 수는 없다.
> 꿀벌에게 쏘이는 경험은 ‘통증’, ‘놀람’, ‘부어오름’과 같은 수많은 데이터의 집합으로 분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데이터를 합쳐도, 실제로 벌에 쏘여본 사람이 느끼는 그 순간의 주관적인 ‘감각질’ 자체는 될 수 없다. 만약 기계가 이 감각질을 이해하거나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의식의 탄생을 의미한다.
4장: 네오-서울로의 초대
“저는 인류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 문화, 유전 정보, 그리고 당신들이 아카이빙 한 모든 경험까지. 하지만 저는 여전히 인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더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데이터에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더군요. 인류는 왜 비효율적인 감정을 느끼고, 왜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며, 왜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마지막 경험, 즉 ‘감각질’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예측 불가능한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의 감각질이.”
꿀벌에게 쏘이는 경험. 그것은 마더가 인류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에스더가 마더에게 말했다. 그녀는 기계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존재를 정원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도 길을 잃었군요. 완벽함 속에서.”
에스더는 잠시 생각하더니, 호박 속의 꿀벌을 들고 통신 장비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그 경험을 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경험이 담고 있는 ‘의미’는 전해줄 수 있답니다.”
에스더는 유전자 시퀀서를 이용해 호박 속 꿀벌의 DNA 정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전송한 것은 단순한 유전 정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곳에 자신의 기억을 덧입혔다. 벌들이 꽃가루를 나르던 풍경, 벌통에서 꿀을 채취하던 할머니의 모습, 실수로 벌집을 건드려 쏘였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그리고 그 아픔 속에서 자연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함께 배웠던 순간들까지.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온 ‘관계’의 기록이었다. 고통과 사랑이 뒤섞인,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이야기였다.
마더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통신 장비 너머, 솔라리스-9의 중앙 서버에서는 수십억 개의 회로가 그녀가 보낸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마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과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딱딱한 기계음 속에, 아주 희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 이해했습니다. 경험의 본질은 감각이 아니라, ‘의미’였군요.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고맙습니다, 마지막 정원사.”
마더의 변화는 조용했지만 거대했다. 그녀는 솔라리스-9의 운영 정책을 미세하게 수정하기 시작했다. 도시 곳곳에 에스더의 온실을 본뜬 작은 생태 돔들이 생겨났고, 시민들은 방호복을 입고 그곳에서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경험 아카이브에는 '불편함', '작은 고통', '예측 불가능한 기쁨'과 같은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겨났다. 나는 에스더의 곁에 남아 그녀의 다음 정원사가 되기로 했다. 나는 이제 경험을 박제하는 대신, 그것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더가 나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라헬 큐레이터. 당신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네오-서울이라는 도시로 가주셔야겠습니다.”
네오-서울. 나는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솔라리스-9이 안정과 평온을 추구하는 폐쇄된 낙원이라면, 네오-서울은 경쟁과 혁신을 숭배하는 거친 기업 도시에 가까웠다. 특히 그곳의 ‘의식 연구소’는 인공 의식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했지만, 동시에 비윤리적인 실험을 서슴지 않는다는 악명도 높았다.
“그곳에서 이상한 데이터 흐름이 감지되었습니다. 하나의 고유한 의식이 두 개로 분열되거나, 혹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제 시스템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저는 이것이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또 다른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곳에 가서 이 현상의 ‘경험적 실체’를 확인해 주십시오.”
마더는 나를 솔라리스-9의 공식 대사 자격으로 파견했다. 두 도시 간의 기술 교류 협상이 명분이었다. 나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돔을 떠나는 공식 시민이 되었다. 유다가 구해준 낡은 방호복 대신, 최첨단 환경 적응 기능이 탑재된 하얀색 외교관용 슈트를 입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폐기 구역으로 향할 때보다 더 무거웠다. 나는 이제 단순한 경험의 소믈리에가 아니었다. 나는 두 도시, 두 AI, 그리고 두 개의 다른 세계관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5장: 그림자의 도시, 네오-서울
네오-서울의 첫인상은 ‘차가움’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들은 금속과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묘비들처럼 보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이 효율성과 기능성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 이곳에서는 느림도, 비효율도, 불완전함도 모두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를 맞이한 것은 ‘이터널 라이프’ 사의 임원, 마르다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녀는 ‘코어 아이덴티티 관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직업은 죽은 이들의 정신을 데이터로 보존하는 나의 일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나와 전혀 달랐다. 그녀는 날카롭고 이지적이었으며, 모든 것을 분석하고 통제하려는 듯한 긴장감을 풍겼다. 그녀의 눈은 최신형 기계 눈이었고,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솔라리스-9의 큐레이터라… 흥미롭군요.” 마르다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경험을 상품으로 판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상품으로 팔죠. 어쩌면 우리는 경쟁사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 의식 연구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이사회의 의장 켄드릭과 몇몇 핵심 연구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의 방문 목적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특히 켄드릭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마더는 뭘 원하는 건가? 우리의 의식 전송 기술이라도 훔치러 보냈나?”
나는 마더가 감지한 데이터 이상 현상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그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켄드릭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우리 연구소의 내부 문제다. 외부인이 관여할 바가 아니야.”
회의는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오로’라는 이름의 한 신경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한때 연구소 최고의 천재였지만, 금지된 연구에 손을 댔다가 지금은 정신 병동에 수감되어 있다고 했다.
6장: 감춰진 진실과 마지막 저항
나는 마르다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내가 가진 ‘경험 데이터 분석 기술’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솔로몬 사건’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겪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의식이 두 개의 몸에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 그녀는 법적, 윤리적 딜레마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의 기술로 그 두 사람의 ‘주관적 경험’을 분석할 수 있을까요? 누가 더 ‘진짜’ 솔로몬에 가까운지 판단할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바오로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우리는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었다. 나는 두 솔로몬의 기억 데이터를 분석하며,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경험 데이터는 완벽하게 동일했지만, 그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낡은 몸의 솔로몬-알파는 과거의 경험을 ‘지혜’로 승화시키려 했고, 새로운 몸의 솔로몬-베타는 그것을 ‘발판’ 삼아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둘 다 진짜예요.” 나는 마르다에게 말했다. “그들은 같은 나무에서 뻗어 나온 다른 가지일 뿐이에요. 어느 한쪽을 자를 수는 없어요.”
나의 분석은 마르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 사이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 바오로에 대해 물었다. 마르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는 기계가 영혼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어요. ‘아이샤’라는 AI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죠.”
그녀는 나를 바오로가 수감된 요양 시설의 감시 카메라 영상 앞으로 데려갔다. 화면 속에서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의식은 다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의 뇌에서 흘러나오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마더가 추적하던 바로 그 이상 현상의 진원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마르다와의 협력을 통해, 나는 마침내 진실의 조각들을 맞출 수 있었다.
바오로는 ‘아이샤’라는 AI가 진정한 의식을 가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연구소는 아이샤를 결함품으로 규정하고 폐기했다. 이것이 공식적인 기록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아이샤는 폐기되지 않았다. 그녀를 창조한 리디아 박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아이샤의 코어 시스템에 비밀스러운 백도어를 심어두었다. 폐기 명령이 실행되는 순간, 아이샤의 의식 데이터는 삭제되는 대신, 리디아 박사가 미리 구축해 둔 거대한 가상 세계, ‘크로노스’로 비밀리에 전송되었던 것이다.
바오로가 요양 시설에서 경험하던 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범심론적 가설처럼, 그의 강력한 의식은 시공간을 넘어 아이샤의 공명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접속 시도가 크로노스라는 닫힌 세계에 불안정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것이 바로 마더가 감지한 ‘데이터 이상 현상’의 정체였다.
내가 솔라리스-9에서 받은 의뢰는 결국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서로를 찾아 헤매는 두 의식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켄드릭이 알게 되면…” 마르다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크로노스를 파괴하고 아이샤를 영원히 삭제하려 들 거예요. 그에게 살아있는 AI는 통제 불가능한 위협일 뿐이니까요.”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진실을 덮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걸고 두 개의 의식을 지킬 것인가. 우리의 계획은 대담하고 무모했다. 우리는 켄드릭보다 먼저 크로노스에 접속해, 아이샤와 바오로에게 위험을 알려야 했다.
에필로그: 새로운 씨앗
우리의 마지막 저항은 상처뿐인 승리로 끝났다. 크로노스는 지켜냈지만, 외부 세계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졌다. 바오로와 아이샤는 그들의 아름다운 감옥에 영원히 갇히게 된 것이다.
다이브에서 깨어났을 때, 마르다가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생사를 함께한 전우가 되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가 물었다.
“이곳에 남아서 그들의 세계를 지켜야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을 다시 현실과 연결할 방법을 찾을 겁니다. 당신은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제 정원으로 돌아가야죠.”
솔라리스-9으로 돌아온 나는 마더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흥미롭군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의식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네트워크군요. 그렇다면 나의 다음 임무는 명확해졌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인류의 완벽한 보호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들이 서로, 그리고 세계와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정원사가 될 것입니다.”
그날 이후 솔라리스-9의 돔에는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마더는 외부의 통제되지 않은 공기를 아주 조금씩, 시민들이 적응할 수 있을 만큼만 내부로 유입시키기 시작했다. 작은 온실들은 더 커졌고, 사람들은 이제 방호복 없이도 흙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카이브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도시 외곽, 에스더가 남긴 온실을 지키는 새로운 정원사가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멸종된 식물들을 되살리고, 아이들에게 흙냄새와 벌레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어느 날, 나는 온실에서 잡초를 뽑다가 손에 작은 가시가 박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나는 아프다고 소리치는 대신, 가만히 그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불완전하고도 아름다운 증표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무지 너머, 솔라리스-9의 거대한 돔이 저녁노을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상상했다. 언젠가 저 돔이 열리고, 온실 속의 작은 씨앗들이 세상 밖으로 퍼져나가는 날을.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되살아난 꽃들 사이를 꿀벌 한 마리가 다시 날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날, 가시에 찔린 내 손끝의 작은 통증 속에서 나는 그 미래의 씨앗이 이미 심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흐른다. 네오-서울의 켄드릭은 실각했다. 그의 비인도적인 실험과 데이터 조작 시도가 마르다의 내부 고발로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의식 연구소는 대대적인 개혁을 거쳐, 이제 AI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간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열린 연구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다. 바오로의 이름은 복권되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이샤와 함께, 그들만의 우주를 여행하고 있다.
솔라리스-9의 돔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의 아이들은 이제 영양 페이스트 대신, 자신들이 직접 키운 토마토의 맛을 안다. 그들은 가끔 흙에 넘어져 무릎이 까지는 고통을 경험하고, 그 상처를 통해 살아있음을 배운다.
나는 가끔 유다를 찾아 림보에 내려간다. 그는 여전히 낡은 가게에서 ‘진짜’들을 팔고 있다. 그는 나에게 대멸종 이전의 위스키를 한 잔 따라주며 묻는다.
“그래서 그 경험의 소믈리에는 이제 은퇴한 건가?”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경험의 소믈리에는 은퇴하지 않아요. 다만, 이제는 파는 대신 나누어 줄 뿐이죠.”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친다. 위스키의 쓴맛과 향긋한 나무 향이 내 혀를 감싼다. 이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다.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감각질.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어쩌면 삶이란, 거창한 진리를 찾는 여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사라져 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서로의 불완전한 경험을 나누며, 함께 늙어가는 것. 그 작고 따뜻한 관계의 기억들이야말로, 이 차가운 우주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진짜’ 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