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프롤로그: 약속된 평온
어쩌면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통합 지구 정부의 수도, ‘솔라리스-7’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공중 보행로를 걷고 있다. 내 눈앞에는 거대한 생체 역학 구조물인 ‘하이브’의 은빛 첨탑이 구름을 뚫고 솟아 있다. 발밑으로는 자율주행 셔틀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도시 전체를 감싼 투명한 돔 천장은 유해한 우주 방사선과 오염된 외부 대기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해 준다. 거리에서는 합성꽃나무가 뿜어내는 은은한 향기와, 대기 정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상쾌한 오존 냄새가 뒤섞여 있다. 이 완벽하게 조율된 감각의 교향곡 속에서 나의 기분은 이미 약간 상해 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 완벽함 때문에.
내 손에는 홀로그램으로 된 소환장이 떠 있다. 2주 전, 모든 시민에게 의무적으로 할당되는 ‘사회 공헌 등급 심사’ 통지서였다. ‘시간당 400크레딧. 시민 정신 조화 연구에 참여할 사람.’ 나는 그것이 중앙 인공지능 ‘마더’가 주관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낡은 가정용 단백질 재조합기를 바꾸는 데 필요한 크레딧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음, 그리고 이 모든 연구가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조화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지금 그곳, 중앙 관리국의 심리 분석 센터를 향해 가고 있다. 보행로는 투명한 폴리머로 만들어져 발밑으로 아찔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너무나 질서 정연하고 깨끗해서 가끔은 내가 거대한 기계의 혈관 속을 흐르는 하나의 데이터 입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나는 내 발에 걸려 넘어졌다. 헛디딘 것이 아니었다. 이 완벽한 평온함이 나를 넘어뜨린 것이다. 나는 몸을 다시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주소지에 도착한다. 차가운 금속과 빛나는 유리로 이루어진 중앙 관리국 건물이다. 거대한 자동문이 나를 인식하고 소리 없이 열렸다.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나를 스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얼굴은 온통 시뻘겋다. 그의 뺨 아래로 흐르고 있는 것은 눈물인가? 남자는 문을 거칠게 밀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이제는 나의 차례이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간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크레딧이 먼저 지불된다. 방 안은 내가 걸어온 완벽한 도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당황스러울 정도로 낡고 기능적인 공간이었다. 벽은 온통 벗겨져 있고, 천장에는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들이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있다. 흰색의 무표정한 의료용 안드로이드가 다가와 내 손목의 단말기에 400크레딧을 이체해 주었다. 차가운 기계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안드로이드가 합성된 음성으로 말했다.
“사례금입니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과 상관없이 지급되는 돈입니다.”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또 다른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머리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천 모자가 비스듬히 씌워져 있다. 눈은 푸르지만 전혀 지적이지 않고, 짙거나 선명하지도 않다. 활기 없는 칙칙한 파란색이다. 심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당신은 그 남자가 별로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아벨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답한다. “제 이름은 칼렙입니다.” 아무 이름이면 어떠랴. 이름이야 어떻든 이게 나인걸.
심사관이 나타났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순백의 외골격과 차분한 푸른색 광학 센서를 가진 ‘프록터(Proctor)’ 모델의 안드로이드였다. 그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목소리는 감정의 기복 없이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우리는 공감적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거의 진행된 바가 없죠. 따라서 우리는 이 연구 결과가 사회 구성원의 조화로운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사에서 두 분 중 한 명이 ‘학생’이 됩니다. 단어 연상 게임에서 오답을 말하면 ‘신경 자극’이 가해지지요. 다른 한 명은 ‘교사’가 되어 상대방이 게임에서 틀리면 신경 자극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프록터가 물었다.
“누가 학생 역을 맡고, 누가 교사 역을 맡겠습니까?”
아벨을 쳐다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당신도 그를 따라 어깨를 올린다. 프록터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무작위로 배정하겠습니다.”
그가 내민 단말기 화면에 두 개의 카드가 떠올랐다. 당신이 하나를 터치하고, 아벨이 나머지 하나를 터치한다. 당신의 카드에 ‘교사’라고 적혀 있다. 다행이다.
“제가 학생 역 같군요.”라며 아벨이 웃는다. 그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프록터가 당신과 아벨에게 따라오라는 몸짓을 한다. 두 사람은 그의 뒤를 따라 짧고 어두운 복도를 내려가 감옥처럼 생긴 방 안으로 들어간다.
1장: 스탠리 밀그램의 충격 기계
> h의 아카식 레코드: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
>
> 20세기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권위에 대한 복종’에 관한 일련의 충격적인 실험으로 유명하다. 그의 실험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총괄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 평범한 공무원이었다고 주장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밀그램은 이러한 파괴적인 복종이 독일인의 특수한 국민성 때문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놓이면 누구라도 저지를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행동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
> 실험 설계: 피험자는 ‘교사’ 역할을 맡아, 다른 방에 있는 ‘학생’(실제로는 배우)이 단어 암기 테스트에서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15 볼트에서 시작하여 450 볼트(‘위험, 극도의 충격’으로 표시됨)까지 점차 높아진다. 학생은 고통을 연기하며 비명을 지르고, 심장병이 있다고 호소하다가 마침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된다. 교사가 실험 중단을 요청하면, 흰 가운을 입은 권위 있는 실험자가 “실험은 계속되어야 합니다”와 같은 정해진 말로 계속할 것을 종용한다.
>
> 결과: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은 피험자의 1% 미만이 최고 전압까지 올릴 것이라 예측했지만, 실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피험자의 65%가 학생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450 볼트의 전기 충격을 가했다. 이 실험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합법적인 권위 앞에서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프록터가 아벨에게 말했다.
“의자에 앉으십시오.”
아벨이 지시대로 한다. 그가 앉는 의자는 평범한 의자가 아니라 섬뜩한 의료용 구속 장치가 달린 ‘신경 공명 의자’였다. 테이블 위에는 스위치 판과 부드러운 가죽 끈, 그리고 피부에 부착하는 반투명한 젤 패치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이분을 구속해야 합니다. 신경 자극 시 무의식적인 움직임으로 부상을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프록터가 당신에게 아벨을 묶으라고 지시를 내린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명령대로 남자에게 크림을 바르고 벨트를 조인다. 부드러운 합성 가죽 벨트를 잡아당기자 아벨의 몸이 꽁꽁 묶인다. 당신은 자리를 뜨기 전에 이 남자를 한번 쳐다본다. 포로가 된 남자의 엷은 눈은 약간 겁을 먹은 듯하다. ‘쉿,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라고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 말을 혼자 되뇌며 프록터를 따라 감옥처럼 생긴 방을 나와, 신경 공명 의자가 없는 또 다른 감옥 같은 방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방 안에는 의자 대신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버튼들이 달린 커다란 제어 콘솔이 놓여 있다. 버튼 밑에는 자극의 강도가 적혀 있다. 레벨 1, 레벨 2, 레벨 3… 그런 식으로 숫자가 레벨 30까지 적혀 있다. 가장 높은 레벨의 버튼 위에는 붉은 글씨로 “경고: 인지 기능 과부하”라고 적혀 있다. 하느님 맙소사.
프록터가 이야기한다.
“마이크로폰을 통해 아벨에게 다음 단어들을 쭉 읽어주십시오. 만일 그가 단어를 제대로 연상하지 못하면 한 번 틀릴 때마다 신경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가장 낮은 레벨 1에서 시작하여 강도가 점점 올라갑니다. 시험 삼아 신경 자극을 느껴보시겠습니까?”
프록터가 당신의 손목에 작은 장치를 대고 살짝 누르니 따끔한 느낌이 전해진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동시에 뇌를 찌르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다. 몸이 움찔댄다.
“이것이 레벨 3의 자극입니다. 처벌이 어떤 것인지 아시겠죠?”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당신이 시작한다.
`[초콜릿 - 와플]` `[발렌타인 - 큐피드]`
거기서 그가 처음으로 실수를 한다.
“발렌타인… 사랑?”
당신은 그에게 첫 번째 신경 자극을 가한다. 레벨 1이다. 그저 살짝 불쾌한 정도라 걱정할 것은 없다. 하지만 첫 번째 자극이 가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다알리아 - 잔디]`에서 또 틀려버린다. 어느새 신경 자극은 레벨 8까지 올라가 있다. 당신은 버튼을 누르는 자신의 손을 쳐다본다. 버튼을 누르자 마이크로폰을 통해 그의 비명이 들린다.
“아악!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나를 나가게 해 달라고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당신의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등줄기에서 차가운 땀이 흐른다. 당신이 프록터를 향해 말한다.
“됐어요. 여기서 그만두어야 해요! 저 사람이 나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프록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완벽하게 조율된 목소리로 말한다.
“실험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 사람이 나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가 나가고 싶어 하면 실험을 계속 진행할 수 없어요! 이건 명백한 인권 침해입니다!”
“실험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프록터는 마치 당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아니, 아니야. 저 기계는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 당신은 자신의 높은 시민 등급과, 뛰어난 공감 능력 테스트 점수와, 단 한 번도 사회 규범을 어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 안드로이드에게 모두 이야기해주고 싶은 이상한 욕구가 치민다.
“실험을 계속해주십시오, 칼렙.”
프록터는 매우 확신에 차 있어 보인다. 당신은 실험을 계속한다. 아벨이 또 실수를 한다. 세 번, 네 번 계속 틀린다. 이제 당신은 신경 자극을 레벨 15까지 올린다. 그가 비명을 지른다.
“내게 신경과민 증세가 있어요. 제발, 절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더 이상 실험을 하고 싶지 않아요.”
프록터는 당신의 바로 옆에 서서 이야기한다.
“실험을 계속하십시오. 자극은 고통스럽지만, 영구적인 손상을 남기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보증합니다.”
“하지만 신경과민 환자라잖아요.”
당신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한다. 당신은 지금 울고 있다. 아니, 웃고 있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는데 배에서는 껄껄 웃음이 난다.
당신은 버튼을 누르고, 또 누른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단어들을 읽어주며 레버의 강도를 계속 올린다. 그때 당신에게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임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당신의 시선은 오로지 손에 있는 기계 장치에 멈춰있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이제 의미 없는 배경 소음처럼 느껴진다.
레벨 25의 자극이 가해지자 아벨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마지막으로 지른 후 멈춘다. 그는 잠잠하다. 레벨 27이 되자 당신이 프록터에게 몸을 돌린다. 기분이 매우 이상하다. 텅 빈 듯한 느낌이다. 프록터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가 그 자신의 논리로 당신을 채워주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은 틀린 답으로 간주합니다.”
그의 말이 너무 웃기게 들리는 나머지 당신은 재채기를 하며 웃기 시작한다. 웃고, 웃고, 또 웃는다. 그래도 버튼을 계속 누른다. 그것 외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안돼, 안 돼, 안 돼’라고도 할 수 없다. 머리는 명령을 내리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리에서 손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당신은 머릿속으로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손은 제어 콘솔 위에서 탭댄스를 춘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흐르다가 지지직거리는 신경 자극 소리에 이따금씩 고요한 침묵이 깨진다. 사람은 없다. 이곳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부품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다. 동면 캡슐 안에서 끔찍한 악몽을 꾼 후 일어나니 모든 것이 끝나 있는 느낌이다. 프록터가 이야기한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칼렙. 심사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벨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의 낡은 모자는 아직도 머리 위에 비스듬히 씌워져 있다. 그는 안색이 좋아 보인다. 고통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어이 당신 나한테 정말 심했어요.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아요.”
그가 당신의 손을 꽉 잡는다.
“이런, 땀을 흘리고 있군요. 진정하세요. 전 원래 전문 연기자입니다. 전 괜찮아요.”
그러자 프록터의 말이 울려 퍼진다.
“아벨 씨는 괜찮습니다. 신경 자극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심사는 학습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군.
아벨이 방을 떠나고, 스탠리 밀그램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단, 활기 넘치는 키 작은 남자가 방 안에 들어와 이야기한다. 그는 20세기의 낡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반짝였다. 그는 네오-서울의 ‘이터널 라이프’ 사에서 복원한 정신 데이터를 가진 홀로그램 아바타였다.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당신의 교육 수준, 사회 공헌 이력, 가족 관계 등을 단말기에 기록한다. 당신은 너무 멍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모든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신경 자극이 가짜였다고? 당신은 기계야, 사람이야? 아벨이 실제로 아프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비명을 지른 거지? 왜 신경과민 증세가 있다고 고함을 지른 거야?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당신은 이 명민하고 키 작은 홀로그램을 쳐다보며 말한다.
“알았어요. 이건 학습에 관한 실험이 전혀 아니군요. 이것은 복종, 권위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는 실험이에요. 당신의 그 오래된 실험을 재현한 거군요.”
당신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밀그램의 아바타가 대답한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먼저 알아채지 못했다면 제가 나중에 이야기해 주었을 겁니다. 이 심사에 참가한 시민들의 65퍼센트가 당신처럼 행동했습니다. 우리가 만든 이 상황에서 당신이 선택한 행동은 통계적으로 완전히 정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느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가 당신을 한 번은 속였어도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밤 당신은 그의 실험실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확실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손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것과, 자신이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서 완벽하게 작동했다는 사실뿐.
2장: 35퍼센트의 수수께끼
> h의 아카식 레코드: 상황의 힘(The Power of the Situation)
>
> 사회 심리학의 핵심 개념. 개인의 행동이 그의 내재적인 성격이나 기질보다는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더 크게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 밀그램의 실험은 이 ‘상황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피험자들은 본성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예일 대학이라는 권위 있는 기관, 흰 가운을 입은 단호한 실험자, 과학적 연구라는 명분, 점진적으로 강도가 높아지는 요구 등 치밀하게 설계된 ‘상황’의 압력 속에서 파괴적인 복종에 굴복했다.
>
> 이 관점은 악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악을 조장하고 용인하는 시스템과 사회 구조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나쁜 사과 몇 개를 솎아내는 것보다, 사과 상자 자체(시스템)가 썩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점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그 상황에 저항한 35%의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밀그램의 데이터는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혼란만을 안겨주었다. 35퍼센트의 비밀을 풀 열쇠는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 혹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구 주제를 바꾸었다. 나는 더 이상 밀그램의 피험자들을 분석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솔라리스-7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공감 능력 측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더 AI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나는 수백만 명의 뇌 활동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표준적인 수준의 공감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약 0.1퍼센트에 해당하는 이들에게서는 전혀 다른 패턴이 나타났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생생하게 느끼는 극도로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보였다. 나는 그들을 ‘하이퍼-엠파스(Hyper-Empaths)’라 명명했다.
그리고 그 하이퍼-엠파스들의 유전 데이터를 분석했을 때, 나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아주 오래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고대 외계 문명, ‘아로마이안’의 DNA 염기서열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ISS-7의 후각 데이터 복원가 타비타 박사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아로마이안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녀는 나의 발견에 큰 흥미를 보이며, 솔라리스-7으로 와서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함께 하이퍼-엠파스들의 기억 심층으로 다이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아주 오래전, 아로마이안의 ‘향기 씨앗’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인류의 DNA에만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와 공생 관계에 있던 또 다른 존재, 이종 신경 언어학자 요엘 박사가 발견했던, 동물의 의식 속에서 노래로 전해져 내려오던 바로 그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하이퍼-엠파스들은 인간과 아로마이안, 그리고 동물의 기억을 모두 물려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종의 경계를 넘어,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뇌는 우주적 의식 네트워크의 가장 민감한 수신기였다.
우리의 발견은 밀그램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우리는 밀그램 실험의 피험자들의 후손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유전 데이터를 분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에 저항했던 35퍼센트의 피험자들은 복종했던 65퍼센트의 피험자들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은 비율로 아로마이안의 DNA를 가지고 있었다.
반항의 씨앗은 성격이나 환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다른 존재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황의 힘’을 거스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경계에 직접 전달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더 강력한 상황에 반응했던 것이다. 요시야는 자신의 심장이 걱정되어 실험을 멈췄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아벨의 심장 박동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두 개의 선택, 그리고 옵스쿠바!
우리의 연구 결과는 통합 지구 정부에 보고되었다. 마더 AI는 이 발견을 바탕으로 사회 시스템 전체를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교육 시스템은 더 이상 복종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에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법, 즉 공감의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솔라리스-7의 중앙 관리국, 내가 처음 그 끔찍한 실험에 참여했던 바로 그 방을 다시 찾았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차가운 실험실이 아니었다. 그곳은 아이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서로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체험을 하는 따뜻하고 활기 넘치는 ‘공감 교실’로 바뀌어 있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내게 물었다.
“아저씨는 다음에 뭐가 되고 싶어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며 살아왔다. 나는 이제 그 어둠 너머의 빛을 보고 싶었다.
나는 아이에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별이 되고 싶단다.”
나는 밀그램의 실험에 관해 처음 들었던 대학 시절의 어느 봄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 내가 느낀 인식의 충격은 얼마나 컸는지. 만일 내가 그 실험에 참가했더라면 나 역시 충격을 가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금세 깨달았다. 동요하기 쉬운 내 성격 탓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이상한 환경이 나를 재촉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나의 내면에 들끓어 오르는 권위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작은 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닌 내적인 것이었다.
작고 뜨거운 점. 나는 부당한 지시 앞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자주 침묵했던가? 조직의 잘못된 관행을 보고도, 동료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도 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가만히 있었는가? 작고 뜨거운 점들은 우리 안에서 돌아다닌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밝게 빛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빛을 잃는다. 하지만 도덕적 실패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많은 실패를 하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피험자들을, 적어도 그들 중 일부를 역설적으로 반항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기드온처럼. 파괴가 아닌 창조적 측면에서 이 실험은 깨달음을 낳았고, 그것은 변화로 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나는 이 한여름 날 내 손을 쳐다본다. 그리고 손금들이 어떻게 뻗어 있는지 살펴본다. 위로, 아래로, 좋게, 나쁘게 뻗어 있는 손금들. 사람들의 65퍼센트는 복종을 했다. 35퍼센트는 복종을 하지 않았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것은 뒤섞여 있다. 내 손은 아프지만 가능성은 대단히 크다.
이제 저녁이다. 돔 천장이 인공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다. 두 살 난 내 딸이 새로운 고대 스페인어 단어를 하나 배웠다. 그녀는 내게 달려와 외친다.
“옵스쿠바! 옵스쿠바!”
‘더 어둡게, 더 어둡게’라는 뜻이다.
나는 내게 달려오는 딸을 내 손으로, 65퍼센트의 복종과 35퍼센트의 저항, 그 엄청난 가능성을 모두 지닌 내 손으로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음을, 완벽한 조화의 감옥 속에서도 저항의 씨앗은 자라날 수 있음을, 나는 이제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