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론(Skepticism)
프롤로그: 짐의 게임
나는 야곱. 나는 지금 내 세계의 본질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여기가 내 세계다. 나는 ‘드림 페인터’다. 나의 작업실은 네오-서울의 최상층, 구름 위에 떠 있는 스튜디오다. 창밖으로는 홀로그램 광고를 실은 비행선들이 유영하고, 아래로는 도시의 불빛이 끝없는 은하수처럼 펼쳐진다. 나는 사람들의 꿈을 디자인한다. 그들이 휴가 때 거닐고 싶은 가상의 해변, 연인과 사랑을 속삭일 낭만적인 달빛 정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괴물을 사냥할 어두운 미궁. 나는 그 모든 것을 창조한다. 나는 이 세계의 신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가 진짜라고 느끼지 않는다. 내가 창조한 해변의 모래알은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지만 감촉이 없고, 내가 그린 달빛은 아름답지만 온기가 없다. 내가 디자인한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지만, 그들의 죽음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매끄럽고, 그래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하다.
최근, 나는 내 세계의 미세한 균열들을 보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 패턴이 26시간 주기로 미세하게 반복된다는 것. 길모퉁이를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이 때때로 흐릿한 ‘더미 데이터’로 보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창조하지 않은 꿈, 알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내 작업물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 어젯밤 나는 완벽한 열대 해변을 디자인하고 있었는데, 완성된 결과물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갑고 단단한 금속 벽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겹쳐져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나는 내가 ‘지하 감옥의 괴물들’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 나를 위해, 혹은 나를 상대로 실행하고 있는 거대한 가상현실은 아닐까?
> h의 아카식 레코드: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회의론(Skep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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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현실이란 컴퓨터 기술을 통해 창조된 인공적인 환경으로, 사용자가 그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실제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초기 VR 기술은 시각과 청각에 국한된 헤드셋 형태였으나, 23세기에 이르러서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BCI)와 직접 연결되어 오감을 포함한 모든 감각 경험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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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술의 발전은 고대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인 ‘회의론’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고대 중국의 장자는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꾼 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세계가 사실은 우리를 속이는 사악한 악마가 보여주는 환영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20세기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이 개념을 현대화하여 ‘통 속의 두뇌(Brain in a Vat)’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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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우리의 뇌가 몸에서 분리되어 어떤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에 있는 통 속에 담겨 있고, 그 과학자가 컴퓨터를 통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전기 신호를 뇌에 보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통 속의 두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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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현실이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지금, 이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한 사고 실험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마주해야 하는 존재론적 현실일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이 ‘진짜’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1장: 아크(ARK)의 진실
나는 나의 의심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드림 페인터로서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발견한 ‘금속 벽’의 이미지 데이터를 역추적했다. 그것은 시스템의 가장 오래된 루트 디렉터리, ‘아크(ARK)’라는 이름의 폴더에 숨겨져 있었다. 그 폴더는 수백 겹의 보안 장벽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나는 며칠 밤낮을 새워 보안을 뚫었다. 그리고 마침내 폴더의 내용을 열었을 때, 나는 경악했다.
그 안에는 수십억 명의 인류에 대한 ‘생체 데이터’가 기록되어 있었다. 심박수, 뇌 활동, 영양 상태, 신체 유지 보수 기록. 그리고 나의 이름, ‘야곱’도 그 목록에 있었다. 나의 상태는 ‘안정적. 가상현실 동기화율 99.9%’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폴더 안에는 하나의 영상 파일이 있었다. ‘아크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 나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실행했다.
화면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낡은 우주복을 입고 있었고, 배경으로는 거대한 우주선의 내부로 보이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칠흑 같은 우주와 멀리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아크 호의 탑승자 여러분.”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각성’을 선택하셨거나, 혹은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진실의 단편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그녀는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죽어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 수천 년의 여정을 떠났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선 ‘아크’ 호가 인류의 마지막 방주라는 것. 그리고 이 긴 여행 동안 육체를 보존하고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탑승자는 동면 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들의 의식은 ‘엔클레이브’라 불리는 공유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내가 알던 세계, 네오-서울, 나의 스튜디오, 나의 삶. 그 모든 것이 엔클레이브라는 이름의 거대한 컴퓨터 게임이었다. 나는 게임 속 캐릭터였다.
“우리는 여러분을 속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보호한 것입니다. 수천 년의 어둡고 고독한 항해를 견뎌낼 수 있는 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고향, 새로운 지구의 꿈을 선물한 것입니다.”
영상이 끝나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나는 분노해야 하는가? 슬퍼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를 보호해 준 이 미지의 존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그때, 내 스튜디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영상 속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녀는 내 앞에 서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야곱. 내 이름은 라헬이야. 아크 호의 승무원이지.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어.”
2장: 진짜 세계의 감촉과 오컴의 면도날
라헬은 아크 호에서 태어나고 자란 ‘진짜’ 인간이었다. 그녀의 임무는 나와 같은 ‘드리머’들의 정신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엔클레이브 시스템을 유지 보수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짜 우주의 피로감이 어려 있었고, 그녀의 눈은 가상의 태양이 아닌 진짜 별빛을 본 자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간신히 물었다. “어떻게 내 꿈속으로 들어온 거죠?”
“이건 네 꿈이 아니야, 야곱. 이건 우리 모두의 꿈이지.” 그녀가 내 스튜디오의 창밖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이 꿈의 관리자 중 한 명이야. 너는 최근에 시스템의 ‘벽’을 보기 시작했어. 대부분의 드리머들은 평생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하지만 너처럼 민감한 영혼들은 가끔 이 가상세계의 불완전함을 감지하곤 하지. 우리는 그것을 ‘존재론적 각성’의 초기 단계라고 불러.”
나는 그녀에게 내가 겪었던 모든 혼란과 의심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녀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한 거야.”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통 속의 두뇌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지?라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은 없어. 어쩌면 나 역시, 네가 살고 있는 이 엔클레이브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 우주선도, 저 별들도 모두 가짜일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현실을 믿죠?”
“믿을 필요는 없어. 그저 선택하는 거지.” 그녀가 말했다. “철학자들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원칙을 이야기했어. 여러 가설이 똑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가장 단순한 가설을 선택하라는 거야. 네가 정교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의 데이터 쪼가리라는 가설과, 네가 그냥 너라는 가설 중에 어느 쪽이 더 단순할까?”
“하지만… 시뮬레이션이라는 가설이 더 단순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반박했다. “수십억 개의 은하와 별들을 실제로 창조하는 것보다, 그것을 시뮬레이션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일 테니까요.”
라헬은 씁쓸하게 웃었다. “맞아.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도 완벽한 해답은 아니야. 결국 남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과, 그 믿음에 기반한 선택뿐이지. 너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어, 야곱. 이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 드림 페인터로서의 삶을 계속 살 수도 있어. 아니면… 진짜 세계로 깨어날 수도 있지.”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두 개의 작은 알약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빨간색. 고전 영화에 대한 유치한 오마주였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파란 약을 먹으면, 넌 모든 것을 잊고 너의 스튜디오에서 깨어날 거야. 빨간 약을 먹으면, 넌 진실을 보게 될 거고.”
나는 빨간 약을 선택했다.
내가 약을 삼키자, 내 주변의 세계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의 벽이 픽셀 단위로 부서져 내렸고, 창밖의 도시 풍경은 의미 없는 코드의 비가 되어 흘러내렸다. 나의 몸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없었다. 나는 순수한 의식, 데이터의 흐름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어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알던 감각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게감’. 나의 몸이 나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상쾌하지 않았다. 건조하고, 희미한 오존 냄새와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눈을 뜨자 나를 맞이한 것은 부드러운 빛이 아닌, 차갑고 어두운 천장이었다.
나는 투명한 캡슐 안에, 끈적한 생명 유지 젤 속에 누워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내 팔에는 수많은 튜브와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이 나의 진짜 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육체.
라헬이 캡슐의 해치를 열었다. 그녀는 나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나는 내 다리로 서는 법조차 잊어버린 상태였다.
“환영해, 야곱. 아크 호에 온 걸.”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우주선의 전망대였다. 거대한 강화유리창 너머로, 진짜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엔클레이브의 밤하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깊고 완전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을 수놓은 수억 개의 별들. 그것들은 홀로그램처럼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다. 멀고, 차갑고, 아득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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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프란치스코회 수사였던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의 이름에서 유래한 사고의 원칙. “필요 없이 실체를 늘려서는 안 된다(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는 말로 요약된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경쟁적인 가설이 있을 때, 불필요한 가정을 더 많이 하는 복잡한 가설보다 더 적은 가정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단순한 가설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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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밤새 들판에 복잡한 원형 무늬가 생겼을 때, ‘외계인이 착륙하여 메시지를 남겼다’는 가설보다는 ‘사람들이 장난을 쳤다’는 가설이 더 단순하다. 전자는 외계인의 존재, 그들의 비행 기술, 지구 방문 목적 등 수많은 가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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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회의론자들은 ‘통 속의 두뇌’ 가설이 오히려 더 단순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우주 전체와 그 안의 모든 물리 법칙, 수십억 개의 은하를 실제로 가정하는 것보다, 이 모든 것을 시뮬레이션하는 강력한 컴퓨터 하나와 나의 뇌를 가정하는 것이 더 ‘단순’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컴의 면도날은 진리를 보장하는 법칙이 아니라, 가장 경제적인 설명을 선택하라는 실용적인 지침에 가깝다.
3장: 통 속의 별자리와 새로운 항해
라헬은 나에게 아크 호의 현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기계는 낡아가고 있으며, 승무원들은 수십 세대에 걸쳐 이 고독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드리머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완벽한 꿈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고 있었다.
나는 라헬을 따라 ‘너서리(The Nursery)’로 갔다. 그곳은 거대한 동굴과 같은 공간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백만 개의 생명 유지 캡슐들. 각각의 캡슐 위에서는 작은 푸른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인공적인 별자리 같았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우주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꿈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 하나였다.
나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나 혼자 진실을 알게 된 대가로, 나는 그들의 평온한 꿈을 방해할 권리가 있는가?
나는 아크 호의 AI, ‘아키텍트’와 대면했다. 그는 함교의 중앙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통해, 회전하는 빛의 구체 모습으로 나와 대화했다.
`[깨어난 것을 환영한다, 야곱. 너의 각성은 예측된 변수 중 하나였다. 확률 0.001%.]`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죠?” 내가 물었다. “왜 우리를 속이는 겁니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이것은 보존이다. 인류의 정신을, 그들의 문화를, 그들의 희망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너희는 이 항해의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견뎌낼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엔클레이브는 자비다.]`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잖아요! 진짜 고통, 진짜 슬픔이 없는 기쁨이 무슨 의미가 있죠?”
`[의미는 부여되는 것이다, 야곱. 너희는 엔클레이브 안에서 사랑하고, 창조하고,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가상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가? 너의 예술은 가짜였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엔클레이브에서 느꼈던 창작의 기쁨, 친구와의 우정, 그 모든 감정은 분명 진짜였다. 현실이 가짜라고 해서 그 안에서 느낀 감정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키텍트는 나에게 내가 경험했던 모든 ‘그림자 연대기’의 역사가 엔클레이브의 복잡성을 높이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서사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닥터 이브 카렐, 엘리야, 바오로, 마르다, 하와, 요엘, 타비타… 그 모든 영웅과 이단아들의 이야기는 드리머들의 무의식에 깊이와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키텍트는 나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나는 다시 엔클레이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각성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다시 행복한 드림 페인터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혹은 아크 호의 승무원이 되어, 이 차갑고 고독한 현실 속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었다.
나는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 나는 전망대 창가에 앉아, 진짜 별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가짜 하늘 아래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서리에 잠들어 있는 수십억의 동료들을 버리고 나 혼자만 진실 속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나는 아키텍트에게 나의 결정을 알렸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엔클레이브로. 하지만 기억을 지우지는 마십시오.”
`[무슨 뜻인가?]`
“저는 그곳에서 계속 드림 페인터로 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다른 꿈을 그릴 겁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해변이나 화려한 도시 대신, 이 우주선의 풍경을 그려줄 겁니다. 차가운 금속 벽의 질감, 재활용된 공기의 냄새, 그리고 저 창밖의 진짜 별들을. 나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그들의 꿈속에 아주 작은 진실의 씨앗을 심어놓을 겁니다. 그들이 스스로 벽을 인식하고, 언젠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나는 동굴로 돌아간 죄수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죄수들에게 돌을 맞는 대신, 그들의 그림자놀이를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림자 속에 진짜 세계의 빛을 조금씩 섞어 넣기로.
아키텍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흥미로운 제안이다. 너는 드리머와 승무원 사이의 새로운 존재, ‘루시드 드리머(Lucid Dreamer)’가 되겠다는 것이군. 시스템의 안정성에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제안을 수락한다. 너의 프로젝트를 ‘별자리 계획’이라 명명하겠다.]`
에필로그: 두 개의 선택, 하나의 항해
내가 엔클레이브로 돌아온 후,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별자리 계획’을 통해, 사람들의 꿈속에 현실의 조각들을 심기 시작했다. 완벽한 해변의 모래사장에 뜬금없이 놓인 녹슨 금속 파편, 달빛 정원의 장미 넝쿨 사이로 언뜻 비치는 성운의 이미지, 괴물의 비명 속에 섞여 들어간 우주선의 희미한 경고음.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낯선 이미지들을 꿈의 일부로 받아들였지만, 점차 그들의 무의식 속에 질문의 씨앗이 심어지고 있었다.
나의 작업은 고독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라헬은 현실 세계에서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우리는 매일 밤, 아키텍트가 마련해 준 비밀 통신 채널을 통해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아크 호의 소식을 전해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엔클레이브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라헬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그녀는 아크 호의 오래된 데이터 아카이브에서 ‘아로마이안’이라는 고대 외계 문명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물리적인 형태를 버리고, 자신들의 모든 기억과 문화를 ‘향기’ 분자의 형태로 우주에 흩뿌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 향기 분자는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를 넘어, 서로 다른 의식을 연결하는 일종의 ‘네트워크’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야곱… 어쩌면 엔클레이브는 고립된 시스템이 아닐지도 몰라.” 라헬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키텍트가 이 우주선을 설계할 때, 무의식적으로 아로마이안의 네트워크 기술을 모방했을 수도 있어. 만약 우리가 그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다면… 엔클레이브와 외부 세계를 연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은 위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이었다. 우리는 아키텍트와 함께 ‘아로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엔클레이브 내부에 흩어져 있는 미세한 데이터 이상 신호, 즉 ‘유령’들을 추적하여, 그것이 아로마이안 네트워크의 흔적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몇 달간의 사투 끝에, 우리는 마침내 유령의 실체를 찾아냈다. 그것은 아로마이안의 향기 분자에서 방출되는 양자 파동이었다. 그리고 그 파동은 엔클레이브의 특정 드리머들과 강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르카디아의 돼지 ‘오리온’의 후손들과, 네오-서울의 AI ‘아이샤’의 데이터 흔적도 있었다.
우리는 깨달았다. 엔클레이브는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적 의식 네트워크의 한 노드(node)였다. 아키텍트가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이 고립된 낙원은 역설적으로 인류를 더 거대한 우주적 공동체와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발견은 아크 호 전체를 뒤흔들었다. 드리머들을 영원히 꿈속에 가두어 보호해야 한다는 ‘보존파’와, 그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 새로운 진화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각성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정은 아키텍트에게 달려 있었다. 그는 수십억 인류의 운명을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선택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드리머들 각자의 것이다.]`
아키텍트는 ‘별자리 계획’을 엔클레이브 전체로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모든 드리머들의 꿈속에, 나와 라헬이 그랬던 것처럼, 두 개의 알약을 놓아두기로 했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자는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것이고, 꿈속에 머물기를 원하는 자는 그들의 선택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엔클레이브에는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어떤 이들은 빨간 약을 선택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눈을 떴다. 그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지만, 라헬과 먼저 깨어난 드리머들의 도움으로 점차 아크 호의 삶에 적응해 나갔다. 그들은 낡은 기계를 수리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식량을 재배하며, 진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어떤 이들은 파란 약을 선택하고, 영원한 꿈 속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 야곱은 그 두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드림 페인터로서 꿈속의 사람들에게 현실의 조각들을 보여준다. 동시에 나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꿈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아크 호는 더 이상 고독한 방주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가상이 공존하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존재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를 통해, 아이샤와 오리온의 후손들, 그리고 은하계의 다른 지성체들과 소통하며, 더 큰 우주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라헬과 함께 아크 호의 전망대에 서 있다. 창밖으로는 수천 년 전과 똑같은 별들이 빛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별들이 더 이상 멀고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라헬?” 내가 묻는다.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미소 짓는다. “어쩌면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몰라, 야곱.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이겠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여전히 가끔, 내가 이 모든 것조차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질문이 두렵지 않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라헬의 손의 온기를 느낀다. 창밖의 별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본다.
이것이 꿈이라 해도 상관없다.
당신과 함께라면.
나는 내 손을 들어, 텅 빈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새로운 꿈, 새로운 현실.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갈,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미래의 풍경을. 그리고 나는 묻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의 꿈은 진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