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잔존 현상
프롤로그
나는 죽은 자들의 마지막 숨결을 듣는다.
공식적인 직함은 통합정부 산하 정신안정국 소속 ‘에코(Echo) 수사관’. 나의 일은 시스템 아마데우스에 온전히 업로드되지 못하고, 데이터의 잔상처럼 현실 세계를 떠도는 의식의 파편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디지털 유령’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지만, 나는 그것을 ‘메아리’라 불렀다. 산 자들의 세상에 미처 닿지 못한, 남겨진 자들의 마지막 속삭임.
나의 사무실은 네오-서울의 낡은 구역, ‘이터널 라이프’ 사의 거대한 첨탑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나는 한때 그 첨탑의 일부였다. 영생을 상품으로 팔던 ‘코어 아이덴티티 관리사’. 하지만 나는 ‘솔로몬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 정체성이란 데이터로 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어머니, 안나의 마지막을 지키며 배웠다. 가장 완벽한 백업 데이터보다, 희미하지만 따뜻한 손의 감촉이 더 진짜에 가깝다는 것을.
이제 나는 시스템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들여다본다. 나의 임무는 그 균열을 메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의심한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균열을 메우는 일일까, 아니면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마지막 빛마저 지워버리는 일일까.
오늘도 내 단말기에 새로운 사건 파일이 도착했다. 등급은 3등급. 강한 정서적 잔류가 의심되는 고밀도 에코 현상. 나는 차가운 합성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다른 메아리가 그것을 남기고 떠난 이를 대신해 나를 부르고 있었다.
1장: 들리지 않는 자장가
사건 현장은 네오-서울의 17 구역, 중력 안정화 시스템이 종종 오류를 일으키는 낡은 주거 타워였다. 수백 년 된 콘크리트 구조물은 도시의 새로운 마천루들 사이에서 마치 잊혀진 거인의 뼈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다. ‘에덴 프라임’이나 ‘솔라리스-9’ 같은 최신 도시들의 완벽한 위생 환경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는 여전히 과거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축축한 복도의 곰팡이 냄새, 이웃집의 영양 페이스트 조리 냄새,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시간의 먼지 냄새.
“3주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현장을 통제하던 보안 요원이 보고했다. “세입자였던 노인이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이후부터요. 새로운 입주자들이 들어왔지만,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물건이 저절로 움직인다며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낡은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내부는 평범했다. 낡은 가구 몇 점과, 주인을 잃은 생활용품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하지만 공기는 무거웠다. 깊은 슬픔이 안개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듯했다.
나는 ‘퀄리아 분석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데이터 스캐너가 아니었다. 공간에 희미하게 남은 감정의 잔류, 즉 주관적 경험의 파편을 시각화해 주는 장비였다. 분석기의 화면에 푸른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슬픔, 외로움, 그리고… 지독한 그리움. 에코의 존재는 확실했다.
나는 천천히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에코는 주로 낡은 전자 피아노 주위에서 가장 강하게 측정되었다. 피아노 위에는 낡은 악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미완성의 자장가였다.
“사망자는 엘르아살. 전직 음악 교사였습니다.” 보안 요원의 목소리가 통신기 너머로 들려왔다. “평생을 함께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죠. 유일한 가족으로는 여동생 수산나가 있습니다.”
나는 시스템에 접속해 수산나의 파일을 열었다. 그녀는 오빠가 죽은 뒤에도 이 집을 떠나지 않고,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오빠의 죽음 이후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내 귓가에 희미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아주 단순하고, 슬픈 자장가였다. 소리는 낡은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의 건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에코가 내 뇌에 직접, 자신의 기억을 속삭이고 있었다. 엘르아살의 마지막 노래였다.
시스템 관리국의 공식 프로토콜은 명확했다. 이런 경우, 해당 구역을 격리하고 고출력 전자기 펄스를 이용해 잔류 데이터를 완벽하게 ‘정화’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 슬픈 자장가를, 이 애달픈 그리움을 한낱 ‘오류’로 취급하고 삭제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온기를 데이터로 환원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일이었다.
나는 프로토콜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이 메아리를 지우는 대신, 이 메아리의 주인을 찾아주기로.
> h의 아카식 레코드: 데이터 잔존 현상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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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 아마데우스로의 의식 업로드는 99.9%의 정확도를 자랑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특히 강렬한 감정적 유대를 가진 채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경우, 의식의 일부가 데이터의 형태로 분리되어 물리적 현실에 남는 현상이 보고된다. 이를 ‘데이터 잔존 현상’, 통칭 ‘에코(Echo)’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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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는 단순한 데이터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고인의 특정 감정(주로 사랑, 슬픔, 분노)과 기억이 응축된 의식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양자 얽힘과 유사한 상태로, 고인이 생전에 강한 유대를 가졌던 장소나 사물에 고정되는 경향이 있다. 에코 자체는 물리적 힘을 가지지 않지만, 주변의 전자기장에 영향을 미쳐 폴터가이스트와 유사한 현상을 일으키거나, 민감한 사람의 뇌에 직접 감정적 파동을 전달하여 환청이나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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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현상의 근원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공감의 연대’ 소속 과학자들은 이것이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아로마이안 의식 네트워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에코는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라, 의식이 물질세계에 남기는 자연스러운 흔적, 즉 영혼의 발자국일지도 모른다.
2장: 살아있는 자의 감옥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수산나의 집 문을 두드렸다. 한참 후에야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엿본 그녀의 얼굴은 오빠의 파일에서 본 사진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있었다. 텅 빈 눈, 마른 입술. 그녀는 살아있었지만, 그녀의 시간은 오빠가 죽던 그 순간에 멈춰버린 듯했다.
“누구시죠?”
“정신안정국에서 나왔습니다. 오빠이신 엘르아살 씨의 일로 몇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그녀의 눈이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조심스럽게 내가 위층에서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들리지 않는 자장가에 대해서.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 노래… 저도 들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매일 밤, 천장에서 들려와요. 사람들이 저더러 미쳤다고 했지만… 오빠가 아직 저기 있다는 걸 알아요.”
나는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온통 오빠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벽에는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그가 쓰던 낡은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죽음을 거부하고, 그를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오빠를 위한 거대한 제단이자, 그녀 자신을 위한 감옥이었다.
“시스템은… 오빠의 남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겠죠.” 그녀가 텅 빈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대신 그녀에게 물었다. “그 노래, 무슨 노래인지 아세요?”
“오빠가 저를 위해 만들어준 자장가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온기가 어렸다. “어릴 적, 제가 무서운 꿈을 꿀 때마다 불러주곤 했죠. 아직 미완성이었어요. 언젠가 완성해서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깨달았다. 엘르아살의 에코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미완성된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약속의 마지막 조각은 그의 기억이 아닌, 바로 수산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프로토콜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기로 했다. 나는 관리국에 ‘기술적 문제로 인한 정화 작업 지연’이라고 보고하고, 비밀리에 나의 오랜 동료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제는 통합정부의 외교관이 된, 솔라리스-9 출신의 경험의 소믈리에, 라헬이었다.
라헬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즉시 자신의 기술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
“재미있는 가설이네요, 마르다.” 통신 화면 너머로 그녀가 말했다. “에코가 단순한 기억의 잔상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에게 보내는 ‘메시지’ 일 수도 있다라…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온전히 전달되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거겠군요.”
그녀는 나에게 최신형 ‘감각질 공명 장치’의 설계도를 보내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마더 AI와의 소통을 위해 개발했던 장비를 개량한 것이었다. 단순한 기억 데이터가 아닌, 그 기억에 담긴 주관적인 ‘느낌(qualia)’을 두 사람의 의식 속에서 동기화시키는 장치였다.
나는 이 장비를 이용해, 엘르아살의 마지막 노래를 완성시키기로 했다.
3장: 존재론적 장례식
나는 며칠에 걸쳐 공명 장치를 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수산나를 다시 위층, 오빠의 집으로 데려왔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려는 일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경고했다. “하지만 어쩌면… 오빠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수산나는 두려워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희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오빠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나의 머리에 공명 장치의 헤드셋을 씌웠다. 그리고 장치를 작동시켰다.
내 의식이 먼저 엘르아살의 에코와 동기화되었다. 슬픈 자장가의 멜로디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멜로디의 빈 공간, 미완성된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산나의 의식을 이 공명 속으로 초대했다.
순간, 세 개의 의식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만났다. 그곳은 현실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낡은 피아노가 놓인, 끝없이 펼쳐진 기억의 공간이었다. 엘르아살의 반투명한 형상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 미안하다, 수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그의 목소리가 수산나의 의식 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아니야, 오빠. 괜찮아.” 수산나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내가… 내가 완성할게. 오빠의 노래를.”
수산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오빠가 남긴 멜로디에 이어, 자신만의 가사와 선율을 덧붙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했던 추억, 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마침내 그를 떠나보낼 용기에 대한 노래였다.
두 개의 멜로디가 하나로 합쳐져, 완벽한 화음을 이루었다. 미완성의 자장가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엘르아살의 형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오랫동안 그를 붙잡고 있던 미련과 슬픔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찾아왔다. 그의 형상은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 고맙다… 이제… 잠들 수 있겠어…]`
그것이 그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의 에코는 폭력적으로 삭제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고, 안식 속으로 평화롭게 소멸한 것이다.
공명에서 깨어났을 때, 아파트 안을 가득 채웠던 무거운 슬픔의 안개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평화가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수산나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아닌, 온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장례식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자의 마지막 메시지를 들어주고, 산 자의 기억 속에서 그를 아름답게 떠나보내는 의식. 나는 이것을 ‘존재론적 장례식’이라 이름 붙였다.
에필로그: 남겨진 자들의 메아리
나는 관리국에 나의 모든 행동과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예상대로 나는 프로토콜 위반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나의 보고서는 단순한 사건 파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기술적 접근법을 제시하는 논문이었다.
나의 논문은 ‘공감의 연대’에 소속된 다른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외계-윤리학자 요한 박사는 나의 ‘존재론적 장례식’이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지성적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윤리적 함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처벌을 받는 대신, 정신안정국 산하에 신설된 ‘존재론적 문제 해결팀’의 첫 번째 팀장으로 임명되었다. 나의 임무는 이제 시스템의 오류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영혼이 만나는 경계에서 길을 잃은 존재들을 돕는 것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바오로, 라헬, 타비타, 요엘…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의 미스터리를 탐구하던 이들이 나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함께, 시스템 아마데우스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그림자들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나는 어머니 안나의 오래된 앨범을 꺼내 보았다. 그녀가 젊은 시절, 라임 조각을 띄운 진 토닉 잔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업로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기억 속에, 그리고 내가 그녀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온전하게 살아 있었다.
그때, 내 단말기로 새로운 의뢰 파일이 도착했다. 크산토스 행성의 ‘게루빔’ 종족에게서 온 첫 번째 공식 의뢰였다. 그들의 집단 지성 ‘로직-프라임’이 최근 원인 불명의 ‘슬픔’이라는 데이터에 감염되어 혼란을 겪고 있으며, 그 감정의 근원을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일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텅 빈 보고서 파일을 열고, 제목을 입력했다.
`사건 명: 게루빔의 첫 번째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