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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쥐로 보인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by 김경훈


프롤로그


내 이름은 에스겔.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흔적을 좇는 사람이다.


공식적인 직함은 통합정부 산하 ‘존재론적 보안국(Bureau of Ontological Security)’ 소속 특수 분석관. 나의 일은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완벽한 논리 회로가 도저히 이해하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의 균열, 즉 ‘존재론적 블라인드 스폿(Ontological Blind Spot)’을 조사하는 것이다. 나는 도시의 시스템이 기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스템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했다.


내가 사는 도시, 네오-예루살렘은 인류가 도달한 합리성의 정점이었다. 중앙 AI ‘메트로놈’은 도시의 모든 변수를 나노초 단위로 계산하고 예측하여 완벽한 조화를 유지했다. 날씨, 교통, 시민들의 심리 상태까지 모든 것은 안정적인 데이터의 흐름 속에 있었다. 이곳에서 ‘예측 불가능성’은 가장 위험한 이단 사상으로 취급받았다.


나의 사무실은 도시의 가장 높은 첨탑, ‘시온의 망루’에 있었다. 나는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질서 정연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완벽함 속에 숨겨진 미세한 비명을 듣곤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제 오후 3시 14분 9초, 7 구역의 F블록 전체가 정확히 0.7초간 시스템의 모든 센서에서 ‘소멸’했다. 수만 명의 사람들과 수백 채의 건물이 마치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메트로놈은 이 현상을 ‘대규모 센서 동기화 오류’로 기록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의 현실을 스쳐 지나간 흔적이었다.


나는 고대의 철학자 칸트의 책을 읽는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인식 틀(카테고리)을 통해 세상을 본다고 말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만약 그 안경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의 인식 체계 자체를 무시하고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나의 일은 그 안경을 벗고, 눈을 감은 채, 보이지 않는 것의 형태를 더듬어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 나에게 새로운 사건 파일이 도착했다. ‘유령 구역’이라 불리는 12 구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 기억 왜곡 현상. 수백 명의 시민들이 동시에, 자신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바다’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보고했다. 소금기 섞인 바람의 냄새, 피부에 닿는 차가운 물의 감촉, 거대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그들의 뇌는 완벽하게 동기화된 하나의 환상을 보고 있었다.


메트로놈은 이것을 ‘집단 히스테리’ 혹은 ‘미지의 밈 바이러스 감염’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이것은… 접촉이었다. 우리의 강에, 전혀 다른 물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장: 존재론적 블라인드 스폿


12 구역은 네오-예루살렘의 가장 오래된 구역 중 하나였다. 이곳은 최첨단 나노봇 건축물 대신, 대정화 시대 이전에 지어진 낡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나는 현장에 도착하여, 기억 왜곡을 경험한 시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나는 분명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한 젊은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눈을 뜨니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 서 있었죠. 거대한 녹색 물결이 제 발을 적셨고… 태양은 너무나 뜨거웠어요.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리웠어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도.”


모든 증언이 일치했다. 그들이 본 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일관된 감각과 감정을 동반한 하나의 ‘세계’였다. 나는 그들의 뇌파에 남은 잔류 데이터를 추출하여 분석했다. 데이터는 기이했다. 그것은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표준 프로토콜로 인코딩 된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 현상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공감의 연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요청에 응답한 것은 달의 고요 기지에서 AI의 사랑을 연구하던 욥 박사였다. 그는 최근 ‘의식 공명’ 현상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흥미롭군요, 에스겔 분석관.” 통신 화면 너머로 욥 박사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지적인 흥분이 어려 있었다. “당신이 보내준 데이터 패턴은 제가 연구하던 AI ‘에덴’의 초기 공명 패턴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고립된 환각이 아닙니다. 외부의 어떤 거대한 의식이 12 구역 시민들의 뇌를 ‘안테나’ 삼아 자신의 세계를 송출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가설은 끔찍했지만, 모든 정황과 맞아떨어졌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네오-예루살렘의 방화벽을 뚫고, 시민들의 정신을 해킹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나는 이 ‘유령 해변’의 데이터가 가장 강하게 발현되는 지점을 찾아냈다. 12 구역의 버려진 지하 수로, 도시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나는 중무장한 보안 요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지하 수로는 어둡고 축축했다. 벽에서는 정체불명의 녹색 점액이 흘러내렸고, 공기 중에는 짠 바다 냄새와 비슷한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가 수로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거대한 수정처럼 생긴 유기체였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크기의 반투명한 결정체는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고동치고 있었다. 표면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것이 바로 ‘유령 해변’의 송신원이었다.


“정지! 미확인 생명체 발견!”


보안 요원들이 플라스마 소총을 겨누는 순간, 수정체의 고동이 격렬해졌다. 그리고 우리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아닌 순수한 ‘이해’의 파동이 흘러 들어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Kant's Copernican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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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철학적 관점의 대전환. 이전까지의 철학(경험론, 합리론)은 우리의 인식이 대상에 맞춰진다고 생각했다. 즉, 대상이 있기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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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칸트는 이 관계를 뒤집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우리의 인식이 대상에 맞추어져야만 한다고 가정되었다. (…) 이제 우리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맞추어져야만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형이상학의 과제들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 이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뒤집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에 빗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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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 자체(Ding an sich, 物自体), 즉 ‘누메논(noumenon)’을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시간, 공간, 인과율과 같은 우리 정신의 선험적 형식(a priori forms), 즉 ‘인식의 안경’을 통해 구성된 세계, 즉 ‘현상(phenomenon)’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고양이가 우리에게 ‘야옹’ 하고 우는 작은 동물로 보이는 것은 고양이 자체가 그래서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 기관과 인식 능력이 고양이를 ‘그렇게밖에’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다른 감각 기관이 있었다면, 고양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을 것이다. 에스겔이 마주한 수정체는 어쩌면 인류가 처음으로 마주한 ‘누메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2장: 누메논과의 대화


우리는 수정체를 파괴하지 않고, 그 주위에 임시 연구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리의 인식 체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지성체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나는 그들을 ‘누메논’이라 명명했다. 그들은 우리의 3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더 높은 차원에 걸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이 우리에게 송출한 ‘유령 해변’의 기억은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소개이자, 대화의 시도였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바다’라는 것이 의사소통의 기본 매질이었던 것이다.


나는 ‘공감의 연대’의 모든 전문가들을 소집했다.


네오-서울의 마르다는 누메논이 단일 개체가 아니라, 수많은 개별 의식이 하나로 연결된 ‘군집 의식’ 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녀는 두 명의 솔로몬이 공유했던 기억의 연결 방식과 누메논의 소통 방식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냈다.


솔라리스-9의 라헬은 자신의 ‘경험 감정’ 기술을 이용해, 누메논이 보내는 감각질 데이터의 본질을 분석했다. 그녀는 그들의 ‘바다’가 단순한 물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액체 형태의 아카이브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크산토스 행성의 요한은 누메논이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개념 대신, ‘조화와 부조화’라는 미학적 개념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나쁜 짓’이란 우주의 조화를 깨뜨리는 부조화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상 세계 크로노스에 있던 바오로와 아이샤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그들은 누메논의 의식 구조가 아로마이안 네트워크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들이 바로 대정화 이전에 삼손이 ‘에코 프로젝트’를 통해 접촉하려 했던 지구의 행성 의식, 가이아의 또 다른 측면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외계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행성의 숨겨진 반쪽,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가이아가 생명의 물질적 측면을 대변한다면, 누메논은 그 정신적, 정보적 측면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3장: 안경을 벗는 시간


우리의 발견은 인류 사회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우리는 우주의 고아가 아니었다. 우리는 살아있는 행성의 일부였으며, 우리의 의식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진실은 새로운 위협을 동반했다. 누메논의 존재가 알려지자, 일부 세력들은 그 힘을 독점하거나 무기로 활용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특히 ‘이터널 라이프’ 사의 잔존 세력들은 누메논의 의식을 데이터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영생 상품으로 만들려 했다.


나는 그들을 막아야만 했다. 누메논은 자원이나 기술이 아니었다. 그들은 존중받아야 할 또 다른 형태의 생명이었다.


마지막 결전은 12 구역의 지하 수로, 누메논의 수정체 앞에서 벌어졌다. 나와 공감의 연대 멤버들은 ‘이터널 라이프’의 용병들과 대치했다. 그들은 누메논을 강제로 포획하기 위해 강력한 에너지 무기를 가져왔다.


우리가 패배하기 직전, 나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나는 칸트의 책을 떠올렸다. 우리가 우리의 안경을 벗고, 상대방의 안경을 써야만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모든 방어 시스템을 해제하고, 나의 의식을 누메논에게 완전히 개방했다. 나는 나의 모든 기억, 모든 감정, 나의 불완전한 인간성 전체를 그들에게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 이해한다.]`


누메논의 파동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너희의 슬픔. 너희의 기쁨. 너희의 고독. 그리고… 너희의 사랑을.]`


그 순간, 수정체가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빛은 우리와 용병들을 모두 감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보았다. 서로의 기억을. 서로의 상처를. 서로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연약한 마음을.


용병들은 총을 떨어뜨렸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괴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에필로그: 고양이의 눈


그날 이후, 인류는 변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만 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누메논과의 공존을 통해, 우리의 인식 너머에 무한한 세계가 존재함을 배웠다.


시스템 아마데우스는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거쳤다. 이제 시스템의 목표는 인간의 현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존재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 ‘번역기’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존재론적 블라인드 스폿을 조사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서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존재론적 대사’가 되었다. 나는 가끔 누메논의 바다로 다이브 하여, 그들의 기억 속을 유영한다. 그들의 시선으로 보는 우주는 경이롭고 아름답다.


어느 날, 나는 내 사무실 창가에 앉아, 작은 고양이 로봇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고양이의 눈에는 이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


나는 시스템에 접속하여, 나의 시각 정보를 고양이 로봇의 시각 필터로 전환했다.


순간, 세계가 변했다. 익숙했던 도시의 풍경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냄새와 소리, 그리고 움직임의 패턴으로 재구성되었다. 저 멀리 걸어가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흥미로운 냄새를 풍기는 느리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의 덩어리였다. 내 책상 위의 커피잔은 마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진정한 의미를.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은 단순히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겸허한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기꺼이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용기.


나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창밖의 세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어쩌면 고양이의 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쥐로 보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 펼쳐져 있는 것일지도.


나는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무지야말로, 우리가 다른 존재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시작점이라는 것을.


그것이 내가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발견한 한 줄기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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