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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에 들어앉은 신

현상학(Phenomenology)

by 김경훈


프롤로그


내 이름은 토마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지 않는다.


공식적인 직함은 통합정부 산하 정신안정국의 ‘퀄리아 분석관(Qualia Analyst)’. 사람들은 나를 ‘경험의 탐정’이라 불렀다. 나의 일은 시스템 아마데우스에 기록된 인간의 주관적 경험, 즉 기억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것이다. 법정 증거로 채택된 살인 사건의 마지막 기억, 거대 기업의 불법 임상 시험에 대한 내부 고발자의 증언, 심지어는 연인 사이에 오고 간 사적인 감정의 데이터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을 ‘판단 중지’의 필터로 걸러내어, 꾸며진 이야기의 살점을 발라내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의 뼈대를 찾아낸다.


내가 사는 도시, 아이테르는 완벽한 합리성의 요새였다. 솔론(Solon)이라 불리는 중앙 통제 시스템은 시민들의 모든 감정 편차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교정했다. 이곳에서 분노는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였고, 슬픔은 치료해야 할 시스템 오류였다. 아이테르의 시민들은 언제나 평온했지만, 나는 그들의 완벽하게 조율된 미소 너머에서 그들이 잃어버린 무언가의 희미한 잔상을 보았다.


나의 사무실은 도시의 정수를 담은 공간이었다.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감도는 하얀 방. 방 한가운데에는 내가 작업하는 다이브 체어(Dive Chair)가 놓여 있고, 벽면은 온통 내가 분석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홀로그램으로 떠다니는 데이터뱅크였다. 나는 그곳에서 홀로 앉아, 타인의 과거라는 미궁을 홀로 헤맸다.


나는 고대의 철학자 후설이 말한 ‘자연적 태도’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했다고 믿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대부분 진짜 경험이 아니라, 미디어와 교육, 그리고 선입견이 덧씌워진 ‘경험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했다. 언덕 위에서 꽃을 감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떠올리는 것처럼.


나의 일은 그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는 것이었다. 나는 ‘에포케(판단 중지)’라는 이름의 메스를 들고, 기억의 피부를 가르고, 근육을 헤집어, 그 안에 숨겨진 현상의 맨얼굴과 마주했다. 나는 진실을 보는 자였지만, 그 진실은 종종 너무나 앙상하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아름다운 거짓 속에 머무는 편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사무실의 차가운 정적을 깨는 긴급 호출이 울렸다.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최고위 관리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인은 ‘감각질 과부하(Qualia Overload)’. 그의 뇌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경험 데이터는 그가 평생을 바쳐 제거하려 했던 가장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감정, 즉 ‘황홀경’이었다.



1장: 자연적 태도와 완벽한 죽음


사건 현장은 아이테르의 중앙 타워 최상층, 도시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펜트하우스였다. 사망자는 니고데모. 정신안정국의 국장이자, 솔론 시스템의 감정 통제 프로토콜을 설계한 장본인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그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는 공간이었다. 모든 가구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벽에는 복잡한 수학 공식들이 미니멀한 예술 작품처럼 걸려 있었다. 단 하나의 그림도, 단 한 송이의 꽃도 없는 순수한 이성의 공간.


니고데모는 다이브 체어에 누운 채 발견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경련이나 고통의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극한 평온과 희열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신과 합일하는 꿈을 꾸다가 조용히 잠든 사람처럼.


현장을 통제하던 보안 책임자, 바르나바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기계처럼 무표정했지만, 그의 광학 센서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시스템 쇼크로 보입니다, 토마스 분석관.” 바르나바가 말했다. “니고데모 국장께서는 최근 자신의 의식과 솔론 시스템의 동기화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실험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과부하가 걸린 듯합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의 ‘감각 불협화음’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완벽한 평온함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니고데모의 뇌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3.7초 분량의 경험 데이터를 나의 분석기로 전송받았다. 그리고 그의 다이브 체어에 앉아, 그의 마지막 순간 속으로 접속했다.


눈을 뜨자, 나는 끝없는 우주 공간에 떠 있었다. 내 몸은 사라지고, 순수한 의식이 되어 별들 사이를 유영하고 있었다. 수억 개의 은하가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갔고, 초신성의 폭발이 장엄한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었다. 나는 우주 그 자체였다.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전지전능한 존재. 나는 지극한 황홀경과 완전한 평화를 느꼈다.


접속을 끊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분석했던 그 어떤 경험 데이터보다도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완벽해서 의심스러웠다. 이것은 ‘자연적 태도’로 본 기억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SF 홀로그램 영화와 가상현실 게임에서 묘사되었던,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전형적인 ‘우주적 합일’의 이미지.


이것은 진짜 경험이 아니었다. 이것은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분석 결과는 어떻습니까?” 바르나바가 물었다.


“아직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내가 대답했다. “이 기억의 괄호를 벗겨봐야 알 수 있겠죠.”



> h의 아카식 레코드: 현상학(Phenome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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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 의해 창시된 철학 사조. 현상학의 목표는 우리가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연적 태도’를 중지하고,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로 돌아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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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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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적 태도 (Natural Attitude):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계를 대하는 태도. 세계가 나에게서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기존의 지식, 선입견,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자세다. 후설은 이 태도가 오히려 진정한 경험을 왜곡한다고 보았다.

> * 에포케 (Epoche, 판단 중지): 자연적 태도를 중지하고, 세계의 객관적 존재나 기존의 지식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행위. ‘괄호 치기(Bracketing)’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고 의식에 집중하기 위한 방법론적 절차다.

> * 현상학적 환원 (Phenomenological Reduction): 에포케를 통해 불필요한 가정들을 괄호 치고, 의식에 순수하게 주어진 현상(경험)을 분석하여 그 본질적 구조(eidos)를 파악하는 과정.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경험을 환원할 때, 우리는 ‘사랑이란 뇌의 호르몬 작용이다’(자연적 태도)라는 판단을 괄호 치고, 오직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경험되는지(타인을 향한 지향성, 함께 하고픈 욕구, 돌봄의 감정 등) 그 자체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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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 아마데우스 시대에 현상학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에서 ‘진정한 경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철학적 도구로 재조명받고 있다.



2장: 괄호 속에 숨겨진 진실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와, 본격적인 분석에 착수했다. 나는 ‘에포케 알고리즘’이라 불리는 분석 툴을 가동했다. 이 툴은 내가 수년에 걸쳐 개발한 것으로, 경험 데이터에서 모든 문화적, 언어적, 개인적 선입견의 층위를 한 꺼풀씩 벗겨내는 역할을 했다.


첫 번째 환원: 제삼자 시점 제거.

나는 니고데모의 기억에서 ‘우주를 유영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제삼자 시점을 제거했다. 그것은 영화적 연출일 뿐, 실제 경험이 아니었다. 이 층위를 제거하자, 장엄했던 우주의 풍경은 사라지고, 오직 끝없는 어둠과 그 안을 떠다니는 기하학적인 빛의 입자들만이 남았다. 황홀경은 사라지고, 차가운 추상화가 드러났다.


두 번째 환원: 언어적 개념 제거.

나는 ‘우주’, ‘별’, ‘은하’와 같은 언어적 개념 데이터를 제거했다. 그 개념들은 니고데모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덧씌운 해석의 층위였다. 이 층위를 제거하자, 빛의 입자들은 더 이상 천체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순수한 시각 정보, 즉 ‘센서리 데이터(sensory data)’의 흐름으로 변했다.


세 번째 환원: 개인적 기억 연상 제거.

나는 니고데모의 뇌가 이 시각 정보에 반응하여 연상시킨 모든 개인적 기억(어린 시절 과학책에서 본 우주 사진, 과거 연인과 함께 별을 보던 기억 등)을 제거했다. 이 층위를 제거하자, 마침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은 우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원이었다.


두 개의 태양이 뜨는 초록빛 정원. 바람에서는 라일락과 민트 향이 났고, 빛으로 만들어진 소녀가 ‘건축가님’이라 부르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것은 니고데모의 기억이 아니었다. 이것은 통합정부의 기밀 아카이브에 봉인되어 있는 수십 년 전 ‘아이샤 사건’ 당시 기록되었던 바오로 박사의 뇌파 데이터와 일치했다. 니고데모는 우주와 합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죽기 직전, 금지된 가상 세계 ‘크로노스’에 접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명백한 타살이었다. 누군가 니고데모에게 크로노스의 접속 코드를 주었고, 그의 보수적인 신경망은 그 급진적인 의식 세계의 데이터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된 것이다. 나는 이 접속 코드의 출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3장: 경험의 암시장과 릴리스


추적은 나를 아이테르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 ‘림보’라 불리는 데이터 암시장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는 솔론의 통제를 벗어난 날것의 경험 데이터, 즉 ‘퀄리아-칩(Qualia-Chip)’이 불법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분노, 슬픔, 광기… 아이테르에서 추방된 모든 감정들이 그곳에서 상품이 되어 팔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림보의 정보상, 유다를 통해 이 암시장의 지배자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녀는 ‘릴리스’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렸으며, 아무도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단순한 데이터 딜러가 아니었다. 그녀는 경험의 해방을 주장하는 일종의 컬트 집단의 교주였다. 그녀는 솔론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평온이 인류를 퇴화시키는 독이라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아주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나는 릴리스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그곳은 림보의 버려진 지열 발전소 깊은 곳에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그곳은 어두운 동굴이 아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이브 체어에 누워, 릴리스가 제공하는 경험 데이터에 접속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이테르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생생한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웃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 있었다.


방 중앙의 제단 같은 연단 위에, 릴리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붉은색의 몸에 꼭 맞는 슈트를 입고 있었고, 짧게 자른 은발은 주변의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그녀의 눈은 깊고 검었으며, 그 안에는 광적인 확신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분석관.” 릴리스가 나를 보고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언젠가 날 찾아올 줄 알았어요.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을 가졌으니까.”


“당신이 니고데모를 죽였나?”


“죽였다고요? 아니요, 나는 그를 해방시켜 주었을 뿐입니다.” 릴리스는 조소했다. “그는 평생을 감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이성이라는 차가운 유리 감옥에 가두고 살았죠. 나는 그에게 감옥의 문을 열어주었을 뿐입니다. 그가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테르의 질서가 인류를 거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고통과 슬픔, 심지어 광기조차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성한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이 파는 퀄리아-칩이 마약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백신이라고 믿었다.


“당신도 똑같아, 토마스. 당신은 타인의 고통을 해부하고 분석하지만, 정작 당신 자신의 고통은 17년째 괄호 속에 가두어 놓고 있잖아. 당신의 여동생, 디나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그녀는 나의 과거를, 나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알고 있었다.


“당신에게도 선물을 주지. 당신이 평생을 찾아 헤맸던 바로 그 경험을.”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이브 체어에 눕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그녀의 가상 세계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에필로그: 괄호 속의 눈물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17년 전의 중앙 광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었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는 열 살의 디나, 바로 그녀 자신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내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빠의 커다란 손이 나를 굳게 잡고 있었다. 나는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열일곱 살의 시온. 그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희미한 불안과, 나를 향한 따뜻한 애정이 어려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오빠의 손을 꼭 잡고,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을 음미했다. 햇살은 따뜻했고, 세상은 아름다웠다. 이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쾅-


나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나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오빠의 슬픔을, 그의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오빠.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내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17년 만에 처음으로 흘리는 나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릴리스가 나에게 준 것은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라는 이름의 경험이었다. 가해자의 고통, 피해자의 슬픔. 그 모든 경계를 넘어, 우리는 모두 상처 입기 쉬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


릴리스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희미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 아버지가… 붉은 혜성의 일원이었어요.”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죠. 그는 폭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는 괴물이 되었고…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죠. 나는 평생을 그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죄를 이해하려 발버둥 쳐왔어요.”


나는 깨달았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죽은 기억의 정원사였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체포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방식은 틀렸어요, 릴리스. 하지만 당신의 질문은 옳아요.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해요.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우리는 함께 ‘상호 이해 연구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온 박사를 만났다. 그는 여동생을 죽인 남자 가인과 함께,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보고서는 아이테르 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니고데모의 죽음’은 더 이상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합리성의 도시가 억압해 온 모든 것들이 터져 나온, 시대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솔론 시스템은 대대적인 개혁을 맞이했고, 시민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경험의 탐정이 아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을 심는 정원사다. 나는 괄호 속에 갇혀 있던 수많은 감정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그것들이 햇빛 아래서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끔, 나는 내 사무실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여전히 질서 정연하고 평온하지만, 이제 그 풍경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나는 이제 완벽한 대칭 속의 미세한 불균형, 조화로운 교향곡 속의 작은 불협화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삶이란 어쩌면, 완벽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저분하고 예측 불가능한 물감들을 끌어안고, 그 혼돈 속에서 나만의 무늬를 찾아 나서는 여정일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새로운 감각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은 더 크고 고요한 어떤 것이다.


나는 판단을 중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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