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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가 보이지 않았던 지휘자,

PPT가 보이지 않는 발표자

by 김경훈


‘약점’. 국어사전에는 ‘약한 부분이나 모자란 점’이라고 적혀 있다. 나에게 그 단어는 구체적인 실체였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그것은 내 이력서의 ‘특기 사항’ 란에는 절대로 적을 수 없는 명백한 나의 약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무대는 종종, 그 약점이라는 이름의 캄캄한 무대 뒤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1. 나의 약점 설명서: 외장하드와 내비게이션


나는 세상을 ‘보는’ 대신 ‘외워야’ 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화장실까지 가는 세 걸음 반의 동선, 책상 위 노트북과 책들의 정밀한 좌표, 자주 가는 길의 보도블록 개수까지. 나의 뇌는 남들보다 용량이 훨씬 더 큰 ‘외장하드’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집 밖을 나서는 것조차 버거운, 말 그대로 ‘물 밖의 물고기’가 될 터였다.


그리고 내게는 최고의 ‘실시간 내비게이션’이 있었다. 바로 안내견 탱고다. 녀석의 묵직한 하네스를 잡고 걸을 때면, 나는 세상의 모든 장애물을 피해 갈 수 있는 무적의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이 외장하드와 내비게이션. 이것들은 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생존 도구였다. 나는 이것들이 언젠가 나의 가장 강력한 ‘강점’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2. 프로젝트 ‘아이다’, 대재앙의 서막


그날은 우리 팀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이었다. 프로젝트의 코드명은 공교롭게도 ‘아이다’. 그 복잡성과 드라마틱한 전개 가능성 때문에 팀원들이 장난처럼 붙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우리의 무대에는 정말로 대재앙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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