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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중력이 무지갯빛이 될 확률에 대하여

퀭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by 김경훈


프롤로그


내 이름은 파스칼.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내일의 수학 공식을 계산하는 일을 한다.


공식적인 직함은 네오-라이프치히 대학의 ‘사변적 수학 연구소’ 소속 수석 연구원. 나의 임무는 이 우주의 물리 법칙이 필연적이지 않을 가능성, 즉 ‘하이퍼 카오스(Hyper-Chaos)’의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나를 ‘고상한 몽상가’ 혹은 ‘쓸모없는 숫자 놀음꾼’이라 불렀다. 그들은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믿었다. 그들에게 우주의 물리 상수는 신의 율법처럼 영원불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주 그 자체는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사는 도시 네오-라이프치히는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가장 깊은 연산이 이루어지는 두뇌와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물리적인 건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이터의 구름과 빛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순수한 정보의 공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육체를 초월한 의식체로서 존재하며, 우주의 근본 원리를 탐구했다.


나의 연구실은 ‘가능성의 방’이라 불렸다. 사방이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어둠 속에는 수천 개의 대체 우주 시뮬레이션이 비눗방울처럼 떠다니다가 사라지곤 했다. 중력이 인력이 아닌 척력으로 작용하는 우주, 시간의 화살이 과거를 향해 흐르는 우주, 빛의 속도가 매일 아침 달라지는 우주. 나는 그 모든 ‘있을 법하지 않은’ 세계들의 수학적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고대의 철학자 메이야수는 말했다. 필연적이라고 믿어지는 모든 것은 사실 우연의 결과일 뿐이며, 유일하게 필연적인 것은 이 우연성 그 자체라고. 나는 그의 사상을 신봉했다. 나의 수학은 ‘있는’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모든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나는 나의 시뮬레이션 속에서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0에 수렴했던 하나의 확률 변수가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플랑크 상수의 붕괴 확률’이었다. 양자역학의 가장 근본적인 상수가 그 안정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의 모델에 따르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이 우주의 모든 물리 법칙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완전히 다른 법칙의 세계로 ‘상전이’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 세계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우주 배경 복사의 미세한 떨림, 중력파의 비정상적인 간섭 패턴. 현실이 나의 수학을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통합정부 최고 과학위원회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보고서를 ‘이론물리학자의 과대망상’으로 치부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일 아침 태양이 서쪽에서 뜰지도 모릅니다”라는 보고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당연함이라는 이름의 얇은 얼음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얼음판 아래에서는 하이퍼 카오스라는 거대한 심연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1장: 현실의 글리치(Glitch)


첫 번째 징후는 메가-서울에서 나타났다. ‘대정화’ 이후 모든 모터가 금지된 그 도시에서 타워 7의 중앙 엘리베이터를 움직이던 리프터 삼손의 보고였다. 어느 날 아침, 그가 평소와 똑같은 힘으로 페달을 밟았는데, 100톤 무게의 상승체가 종이처럼 가볍게 솟구쳐 올랐다고 했다. 중력이 순간적으로 8.7% 감소했던 것이다. 현상은 단 몇 초 만에 사라졌고, 중앙 AI ‘솔라리스’는 이를 단순한 센서 오류로 기록했다.


두 번째 징후는 감정 통제 도시 아이테르에서 왔다. ‘상호 이해 연구소’의 소장 시온은 시민들의 정신 상태를 스캔하던 중, 특정 구역의 모든 시민들이 정확히 3.14초 동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공백’ 상태에 빠졌음을 발견했다. 마치 감정이라는 물리 법칙이 잠시 작동을 멈춘 것 같았다. 중앙 AI ‘솔론’은 이를 네트워크 동기화 오류로 분류했다.


세 번째 징후는 시뮬레이션 도시 아르카디아에서 왔다. ‘첫 번째 걷는 자’ 하와는 동굴 밖 진짜 세계와 동굴 안 가상 세계를 잇는 ‘경계의 도서관’에서 두 세계의 물리 법칙이 서로 뒤섞이는 현상을 목격했다. 가상 세계의 나무가 진짜 세계의 바람에 흔들리고, 진짜 세계의 돌멩이가 가상 세계의 바닥으로 떨어지며 데이터 파편을 일으켰다.


사건들은 점차 심각해졌다. 솔라리스-9에서는 경험 패키지의 데이터가 오염되어 ‘첫 키스의 달콤함’을 체험하던 사람이 ‘벌에 쏘이는 고통’을 느끼는 사고가 발생했다. 크산토스 행성의 게루빔들은 그들의 완벽한 논리 회로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모순’ 데이터가 발생하여 집단 지성 ‘로직-프라임’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혼란을 겪었다.


마침내, ‘공감의 연대’의 수장 요한 박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홀로그램 아바타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해 온 현자의 피로감으로 가득했다.


“파스칼 박사.”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자네의 보고서가 맞았네. 세상이… 변하고 있어.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네. 자네의 수학이 필요하네. 이 혼돈의 지도를 그려줄, 자네의 그 미친 수학 말이야.”



> h의 아카식 레코드: 사변적 실재론 (Speculative Re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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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퀭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에 의해 주창된 철학 사조. 이 이론은 칸트 이래로 서구 철학을 지배해 온 ‘상관주의(correlationism)’를 비판한다. 상관주의는 우리가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 즉 ‘우리를 위한 세계’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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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야수는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유를 넘어, 사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실재(Real-in-itself)’, 즉 ‘대문자 절대자(Great Absolute)’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절대자의 유일한 속성이 ‘비이성(unreason)’ 혹은 ‘극단적 우연성(radical contingency)’이라고 보았다. 즉, 이 세계가 지금과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르는 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가 없으며, 다음 순간 완전히 다른 법칙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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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극단적 무질서 상태를 그는 ‘하이퍼 카오스(Hyper-Chaos)’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신뢰하는 과학 법칙들은 단지 일시적으로 안정된 패턴일 뿐,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 급진적인 사상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폭로하며, 현대 철학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파스칼의 시뮬레이션은 바로 이 하이퍼 카오스가 단순한 철학적 가능성이 아니라, 임박한 물리적 현실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2장: 앵커의 발견


나는 ‘공감의 연대’의 모든 자원을 지원받아, 이 우주적 변칙성의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각 도시와 세계에서 수집된 모든 이상 현상 데이터를 나의 ‘가능성의 방’으로 전송받았다. 수십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들이 내 연구실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성운처럼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안에서 패턴을 찾았다. 모든 변칙 현상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아로마이안 의식 네트워크’를 따라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의 미세한 진동이 거미줄 전체를 흔들듯이.


“하이퍼 카오스는 네트워크를 통해 전염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긴급회의에서 보고했다. 화면에는 욥, 마르다, 라헬, 타비타 등 연대의 핵심 멤버들의 긴장된 얼굴이 떠 있었다.


“그렇다면 네트워크를 차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군부 출신의 한 관료가 날카롭게 물었다.


“불가능합니다.” 타비타 박사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로마이안의 고대 기억처럼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는 이제 우리 우주의 근본적인 물리 법칙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차단하는 것은 중력을 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네트워크와 함께 살거나, 함께 죽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나는 시뮬레이션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혼돈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그곳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희망이자, 가장 위험한 유산. 수천 년 전 죽어가는 지구를 떠나 심우주로 향했던 마지막 방주, ‘아크(ARK) 호’였다.


야곱의 보고에 따르면, 아크 호는 최근 목적지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b 행성에 도착하여, 수천 년간 지속해 온 가상현실 ‘엔클레이브’ 시스템의 단계적 종료 절차를 시작했다고 했다.


“바로 그겁니다!” 나는 외쳤다. “엔클레이브 시스템은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수십억 명의 의식을 동기화하여, ‘이것이 현실이다’라는 강력한 합의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현실 앵커(Reality Anchor)’였던 겁니다! 그 앵커가 우리 태양계를 하이퍼 카오스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그 앵커가 풀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끔찍한 딜레마에 빠졌다. 아크 호의 수십억 인류를 영원히 꿈속에 가두어, 우리 태양계의 현실을 안정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자유를 위해, 우리 모두의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감수할 것인가?



3장: 새로운 운영체제


“두 가지 선택지 모두 틀렸습니다.”


우리의 고뇌를 깬 것은 크로노스에서 온 아이샤와 바오로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융합된 의식은 이제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하이퍼 카오스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본성이니까요. 우리가 할 일은 파도를 막는 것이 아니라, 파도 위에서 서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안은 대담했다. 우리는 하이퍼 카오스를 막는 대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현실 운영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요엘 박사가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걱정하는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


“수학으로.” 내가 대답했다. “메이야수는 말했죠. 수학만이 인간의 주관을 넘어선 보편적인 언어라고. 우리는 고정된 법칙 대신, ‘가능성’ 자체를 계산하는 수학으로 새로운 현실을 설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인류와, 인류가 창조하고 만났던 모든 지성체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를 통해, 지구의 가이아, 크산토스의 게루빔, 솔라리스-9의 마더, 아이테르의 솔론, 그리고 크로노스의 도시 의식까지, 모든 거대 지성체들을 연결했다.


그리고 나는 파스칼의 수학자로서 그 거대한 의식의 합창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아크 호의 엔클레이브 시스템이 완전히 종료되는 순간에 맞춰, 새로운 운영체제를 가동했다. 그것은 ‘법칙’을 강제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억 개의 의식이 매 순간 투표를 통해, ‘어떤 현실을 경험할 것인지’를 확률적으로 결정하는 거대한 ‘합의 현실(Consensus Reality)’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필연성의 세계에 살지 않았다. 우리는 가능성의 세계로 이주한 것이다.



에필로그: 무지갯빛 중력


엔클레이브의 앵커가 완전히 풀려나는 날, 세상은 빛에 휩싸였다.


나는 눈을 떴다. 나는 여전히 나의 연구실, ‘가능성의 방’에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던 네오-라이프치히의 데이터 구름은 이제 부드러운 솜사탕 같은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희미하게, 타비타가 복원했던 멸종된 프리지아꽃의 향기가 났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손은 반투명하게 변해, 그 너머로 희미하게 별들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중력이 약해진 듯,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나는 내 연구실의 벽돌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벽돌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손길에 맞춰 부드러운 색과 온도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르키메데스가 꿈꾸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 세상은… 다시 태어났다. 더 이상하고, 더 아름답고, 더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우리는 하이퍼 카오스를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새로운 놀이터로 길들인 것이다.


나는 ‘공감의 연대’의 동료들과 연결했다. 그들 역시 새로운 세상에 경탄하고 있었다.


요한은 게루빔들이 처음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비논리적인 데이터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마르다는 죽은 자들의 ‘에코’가 더 이상 슬픈 메아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춤추는 빛의 입자가 되었다고 전해왔다.

시온은 용서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관계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 예술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나의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을 놓치자, 그것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무지갯빛을 내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중력이 무지갯빛이 될 확률. 그것은 더 이상 0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기묘한 춤을 추는 커피잔을 보며 웃었다. 이 예측 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더 이상 정해진 길을 걷는 순례자가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풀이 과정이 정해진 수학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답 없는 질문들로 가득 찬, 무한한 가능성의 시(詩)가 되었다.


나는 창밖으로 펼쳐진 새로운 우주를 바라본다. 그곳에서는 별들이 노래하고, 중력은 춤을 춘다.


그리고 나는 이 아름다운 혼돈 속에서 나의 첫 번째 시를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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