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오류를 허용하라
역사 속 절대 권력자 곁에는 항상 기묘한 존재가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12세 곁엔 '트리불레'가 영국의 제임스 1세 곁엔 '아치'가 있었다. 그들은 '궁정 익살꾼(Court Jester)'이라 불렸지만, 그들의 진짜 직업은 단순한 코미디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왕에게 직언(直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면책특권'이었다.
엄숙한 궁정의 신하들이 아첨이라는 왜곡된 데이터만 왕에게 입력할 때, 익살꾼들은 풍자와 조롱이라는 형식을 빌려 통치 시스템의 버그(Bug)를 지적했다. 앙리 4세의 익살꾼 니콜라 주베르가 '멍청이들의 왕자'라 불린 것은 역설적이다. 그는 가장 멍청한 척하면서 가장 예리하게 권력의 허상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직된 조직이 오판을 내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살아있는 '오류 검증 시스템'이었다.
근대 서커스로 넘어오면 어릿광대의 역할은 더욱 흥미로운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바로 '흰 어릿광대(White Clown)'와 '오귀스트(Auguste)'의 콤비다.
흰 어릿광대는 우아한 의상을 입고,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완벽한 질서를 대변한다. 반면, 헐렁한 옷에 빨간 코를 단 오귀스트는 어수룩하고 실수투성이며 무질서(Chaos)를 상징한다. 서커스의 웃음은 언제나 오귀스트가 흰 어릿광대의 완벽함을 흉내 내다 실패할 때 터져 나온다.
정보학적 관점에서 흰 어릿광대는 '완벽한 알고리즘'이고, 오귀스트는 '예측 불가능한 사용자'다. 관객들이 흰 어릿광대가 아니라 오귀스트를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완벽한 기계적 질서보다, 실수하고 넘어지는 인간적 불완전함에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릿광대(Clown)'의 어원이 서투른 농부를 뜻하는 '클로드(Clod)'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 직업의 본질이 '실패의 미학'에 있음을 증명한다.
놀랍게도 북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서 오귀스트(바보 광대)에 해당하는 존재는 가장 강력한 창조신으로 묘사된다. 이는 "질서(Cosmos)는 유지를 가능하게 하지만, 혼돈(Chaos)은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진리를 내포한다.
연금술에서도 어릿광대는 중요한 상징이다. 그는 물질을 녹여 검게 만드는 '용해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물질이 탄생하는 '흑색화 단계'를 이끈다.
즉, 어릿광대는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굳어버린 시스템을 유연하게 녹여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혁신의 촉매제'인 것이다.
현대 사회는 흰 어릿광대들의 전성시대다. AI는 오차 없는 정답을 내놓고, 자율 주행차는 완벽한 궤도를 그리며, 사회는 무결점의 스펙을 요구한다. 실수는 곧 무능이고, 오귀스트의 빨간 코는 낙오자의 낙인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경고한다. 웃음과 비판이 거세된 완벽한 시스템은 반드시 내부로부터 붕괴한다고. 프랑스의 회계 장부에 '익살꾼' 지출 내역이 사라지는 순간, 왕조의 몰락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흰 어릿광대가 아니라, 기꺼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경직된 분위기를 깨뜨릴 오귀스트다.
"이봐, 그건 너무 심각하잖아!"라고 외치며 회의 탁자에 찬물을 끼얹는 유머, 알고리즘의 맹점을 파고드는 기발한 엉뚱함. 그것이 삭막한 디지털 사회를 인간답게 숨 쉬게 하는 산소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비틀거리는 오귀스트들이다. 실수를 하고, 오해를 하고, 가끔은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인다. 하지만 그 서투름이야말로 우리가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증거다.
자신의 서투름을 감추려 흰 분칠을 덧바르기보다, 차라리 빨간 코를 당당히 드러내 보자.
세상은 완벽한 사람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을 더 사랑한다. 그리고 신화가 말해주지 않는가. 그 엉뚱한 바보가 사실은 우주를 창조한 신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