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견 탱고의 신학
인터넷에 떠도는 개와 고양이의 심리 차이는 짧지만 통렬하다.
개는 밥을 주는 인간을 보며 "나를 먹여 살리다니, 당신은 신입니다!"라고 숭배한다. 반면 고양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나를 먹여 살리다니, 나는 신인가 봐!"라고 오만해진다.
이 유머는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극단적 관점을 보여준다. 개는 봉건적 충성(Feudalism)을, 고양이는 유아론적 나르시시즘(Solipsism)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나의 눈이 되어주는 안내견, 래브라도 리트리버 '탱고'는 어느 쪽에 속할까?
많은 이들이 안내견을 '천사' 혹은 '충직한 개'로 보기에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당사자이자 탱고의 파트너로서 단언컨대, 안내견의 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철학자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흥미로운 통찰을 던진다. 주인은 노예에게 의존하고,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립성을 획득함으로써 결국 주종 관계가 역전되거나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나와 탱고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다. 겉보기에 나는 목줄(하네스)을 쥐고 명령을 내리는 '주인'이고, 탱고는 그에 따르는 '종'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순간 권력관계는 미묘하게 뒤집힌다.
시각 정보가 차단된 나에게, 전방의 장애물을 파악하고 경로를 결정하는 정보의 독점권(Information Monopoly)은 전적으로 탱고에게 있다. 내가 "앞으로 가"라고 명령해도, 탱고가 보기에 위험하다면 그는 가지 않는다. 이것이 안내견 훈련의 핵심인 '지적 불복종(Intelligent Disobedience)'이다.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존재. 이 시점에서 탱고는 단순한 개가 아니라,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공동 의사 결정권자'로 격상된다.
반려견과 주인의 관계가 정서적 애착에 기반한다면, 안내견과 사용자의 관계는 고도의 '신뢰 계약(Fiduciary Contract)'에 가깝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나는 탱고에게 '의식주와 애정'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탱고는 나에게 '보행 안전'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차가운 거래가 아니다. 탱고는 기계적인 내비게이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은 길이 막히면 짜증을 유발할 뿐이지만, 탱고는 내가 불안해하면 꼬리를 치며 내 다리에 몸을 비빈다. 이는 서비스 품질을 넘어서는 '정서적 효용'의 극대화다. 탱고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를 절대적인 신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는 나를 '지켜줘야 할, 손이 많이 가는 VIP 클라이언트' 쯤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설마 탱고도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할까?"
고양이처럼 "내가 신이다"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안내견은 태생적으로 타인(주인)에게 주파수를 맞추도록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처럼 "주인이 신이다"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헛발질, 길을 잃고 당황하는 모습, 문틀에 머리를 찧는 나약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탱고에게 나는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탱고에게 나는 무엇인가.
아마도 '팀장님' 정도가 아닐까 싶다. 방향(비전)은 제시하지만 실무(보행)는 대리(탱고)에게 의존해야 하는 가끔은 멍청한 지시를 내리지만 밥값과 간식비는 꼬박꼬박 결제해 주는 그런 믿음직하면서도 허술한 리더.
개는 인간을 신으로 보고, 고양이는 자신을 신으로 본다.
하지만 안내견은 인간을 '동료'로 본다.
우리는 하네스라는 가느다란 가죽끈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의 부족함(나의 시각, 탱고의 사회적 권리)을 채워주는 퍼즐 조각이다.
탱고가 나를 신으로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덕분에 나는 신처럼 완벽할 필요 없이 그저 탱고의 등을 믿고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되니까.
어쩌면 진정한 신은 나도 탱고도 아닌, 우리 둘이 발맞춰 걷는 그 '사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