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파도를 넘는 휴머니즘의 뗏목

by 김경훈


세라 베이크웰의 저서 <혐오의 시대, 인간이 지켜야 할 고유의 가치>는 묵직한 돌직구를 던진다.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모두가 인간으로 죽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기(利器)라 불리는 기술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 속의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우리를 연결하기보다 고립시킨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분노'와 '혐오'가 가장 강력한 트래픽(Traffic)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담긴 뉴스 피드를 배달받는다.

정보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라는 감옥이다. 나와 같은 생각, 나를 화나게 하는 대상만을 보여주는 거울 방에 갇혀,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감각을 상실해 가고 있다.



저자는 14세기 페트라르카부터 20세기 버트런드 러셀에 이르는 휴머니스트들을 호명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 역시 흑사병, 전쟁, 종교 재판이 횡행하던 '혐오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는 대신 '연결'을 택했다.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의 키케로에게 편지를 썼고, 몽테뉴는 자신의 내면을 기록하여 타인과 공유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지만, 책과 편지라는 매체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지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정보학자로서 나는 도서관을 '휴머니즘의 벙커'라고 부르고 싶다. 세상이 혐오로 불타오를 때, 도서관은 인류가 남긴 이성과 사랑의 기록(Record)을 안전하게 보존함으로써, 미래 세대가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씨앗(Data)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책은 언어와 서사, 기록의 힘을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하고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짐승의 단계에서 벗어난다.

시각장애인인 나에게 이 메시지는 더욱 강렬하다. 나는 볼 수 없기에, 세상의 정보를 주로 '텍스트(음성)'로 받아들인다. 시각 이미지는 직관적이지만 휘발성이 강하고, 종종 외모나 피부색 같은 껍데기로 편견을 조장한다. 반면, 텍스트와 목소리는 더 깊은 사유를 요구한다.

상대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공감(Empathy)'을 불러일으킨다. 기록하고 읽는 행위는 타인의 삶에 접속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프로토콜이다.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기록은 그 자체로 저항이다.



시각장애라는 조건은 나를 알고리즘의 시각적 유혹에서 한 발짝 떨어뜨려 놓았다. 나는 화려한 썸네일이나 자극적인 짤방(Meme)을 보지 못한다. 대신 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하면, 그 사람이 입은 옷의 브랜드나 생김새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눈으로 볼 때보다 편견 없이 상대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휴머니즘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듣고, 혐오하기 전에 한 번 더 상상하는 태도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각적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의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의도적인 실명'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인간으로 죽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혐오의 파도가 높을수록 우리는 휴머니즘이라는 뗏목을 단단히 엮어야 한다. 그 뗏목의 재료는 타인에 대한 호기심, 약자에 대한 연대, 그리고 끊임없이 읽고 쓰는 기록의 힘이다.


기술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위로하는 그 따뜻한 체온만큼은 어떤 알고리즘도 흉내 낼 수 없다.

나는 오늘도 스크린리더가 읽어주는 책 속에서 700년 전의 휴머니스트들을 만난다. 그들이 건네는 손길이 느껴진다.

"포기하지 마라.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

이 믿음 하나가 혐오의 시대를 건너게 하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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