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분류학

달과 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

by 김경훈


문헌정보학이 지식을 분류하여 서가에 꽂는 학문이라면, 역법(Calendar)은 흘러가는 시간을 분류하여 문명의 서가에 꽂는 '시간의 분류학'이다.

고대인들에게 시간은 카오스였다. 계절은 순환하고 별은 움직이는데, 이것을 명확한 '좌표'로 고정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도(경제), 제사를 지낼 수도(종교)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달력이다. 이는 인류가 자연이라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효율적으로 검색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메타데이터(Metadata)' 시스템이다.



초기 문명들이 대부분 태음력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정보학적으로 볼 때, 달은 '사용자 경험(UX)'이 압도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태양의 움직임은 미세하여 매일의 차이를 눈으로 식별하기 어렵지만, 달은 차고 기우는 모양이 직관적인 시각 정보로 제공된다. "저 달이 다시 차오르면 만나자"라는 약속은 얼마나 명쾌한가.

하지만 문제는 '호환성'이었다. 달의 주기(29.5일)를 열두 번 더해도 354일에 불과해, 태양의 주기(365.24일)와 11일이나 차이가 난다. 이 오차가 누적되면 달력상으로는 여름인데 눈이 내리는 심각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다. 농경 사회에서 계절(태양)과의 불일치는 곧 기근과 죽음을 의미했다.

결국 인류는 직관적인 '달'과 필연적인 '태양'을 화해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집트, 유대, 중국 등 고대 문명들이 고안한 '태음태양력'과 '치윤법(Intercalation)'은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 패치'와 같다.

이집트인들은 남는 5일을 '덤'으로 끼워 넣었고, 유대인과 중국인들은 3년마다 윤달을 넣어 벌어진 시차를 메꿨다.

특히 마야인들이 1년을 18개월(20일)로 나누고 남은 5일을 '불길한 날'로 여겼다는 점은 흥미롭다. 정보학적으로 이 5일은 분류 체계에 들어가지 않는 '미분류 데이터(Unclassified Data)'다. 시스템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잉여의 시간은 고대인들에게 혼란과 공포(액운)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반면, 이슬람력은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인위적인 윤달을 거부하고 순수한 태음력을 고수한다. 이는 효율성(경제)보다 원칙(종교)을 우선시한 결정으로, 그들만의 독자적인 시간관을 형성했다.



시각장애인인 나에게 역법의 역사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정안인(비장애인)들에게 달력은 시각적인 달의 모양(위상)에 의존해 발전했다. 하지만 나는 달이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없다. 대신 나는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습도, 바람의 냄새, 태양의 복사열로 시간을 감각한다.

나에게 시간은 '보이는 달'의 주기가 아니라, '느껴지는 계절'의 흐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태음력보다 태양력에 더 민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시각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계절의 변화는 생존과 직결되는 가장 확실한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간을 물리적인 시계의 시간(Time)과 주관적인 지속의 시간(Duration)으로 구분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의 시간은 달력의 숫자보다 내면의 리듬, 즉 '지속'에 더 가깝게 흐른다.



완벽한 달력은 없다. 그레고리력조차 4년에 한 번씩 윤년이라는 수선 공사를 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적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정교한 시스템(분류법)도 대자연의 흐름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는 겸손함이다.


우리는 늘 계획을 세우고(달력), 그 계획이 틀어지면 불안해한다. 하지만 수천 년 전 조상들은 달과 해가 어긋나는 그 11일의 오차를 '윤달'이라는 여유로 끌어안았다.

오차가 생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이다.

내 인생에도, 당신의 인생에도 가끔은 마야의 5일처럼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한 날들이나, 중국의 윤달처럼 덤으로 주어지는 공백기가 찾아온다.

그때 당황하지 말자.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계절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동기화(Synchronization)'의 시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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