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가는 바나나와 좀비 프로토콜

'이유'가 소거된 폭력에 관하여

by 김경훈


다섯 마리의 침팬지가 갇힌 방, 사다리 위의 바나나, 그리고 찬물 세례. 이 실험의 초기 설정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다리를 오르면(원인) → 물벼락을 맞는다(결과)."

그러나 원숭이가 한 마리씩 교체되면서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찬물'이라는 원인은 사라졌는데, '구타'라는 결과만 남은 것이다.

문헌정보학적 관점에서 이 현상은 '메타데이터(Metadata)의 소실'이다. 데이터(행동)는 전승되었으나, 그 데이터가 생성된 맥락(Context/이유) 정보가 삭제된 것이다.

이유를 모르는 규칙, 원본의 맥락이 거세된 텍스트. 이것을 우리는 '도그마(Dogma)' 혹은 '관습'이라 부른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왜곡되고, 왜곡된 기억은 폭력이 된다. 마지막에 남은 다섯 마리의 원숭이는 자신들이 왜 동료를 때리는지조차 모르는 정보학적으로 가장 불행한 '좀비 프로세스'의 수행자들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생각하지 않음(Thoughtlessness)이 가장 큰 죄"라고 말했다.

새로 들어온 원숭이를 집단 구타하는 기존 원숭이들은 악마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여기선 원래 그래"라는 규칙에 충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성실함이 바로 죄악이다.

사다리 위에 바나나가 여전히 신선한지, 천장에서 물이 나오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남들이 하니까 나도 때린다는 태도.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인(Das Man, 비본래적 존재)'의 전형이다.

철학은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학문이다. "왜 사다리에 오르면 안 되는가?" 이 질문이 거세된 사회는 그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다. 질문하지 않는 자들은 바나나를 먹을 자격이 없다.



나는 이 우화 속에서 매를 맞는 '새로 들어온 원숭이'에게 깊이 이입한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세상을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매질'을 당한다. 과거에는 기술이 부족해서(찬물) 시각장애인이 웹사이트를 이용할 수 없거나, 키오스크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크린리더 기술이 발전했고, AI가 이미지를 읽어준다. 찬물은 멈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많은 웹사이트와 키오스크는 여전히 접근성을 갖추지 않고 있다. 내가 "저도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습니다(바나나를 먹고 싶습니다)"라고 손을 뻗으면, 시스템은 "오류입니다", "지원하지 않습니다"라며 나를 때린다.

개발자에게 묻는다. "왜 접근성을 넣지 않았나요?"

그들은 답한다. "원래 관행이 그렇습니다." 혹은 "예전부터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는데도, 과거의 관성에 젖어 여전히 나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매질. 이것이 내가 겪는 '접근성 차별'의 본질이다.



기업 경영에서 이런 현상을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 부른다. 비효율적인 줄 알면서도 과거의 방식(Legacy)이 편하기 때문에 계속 쓰는 것이다.

바나나는 썩어가고 있다. 사다리는 텅 비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은 여전히 문만 쳐다보며 누군가를 때릴 준비를 한다. 이 비극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맞을 각오를 하고, 혹은 맞으면서도 끝까지 사다리를 올라가 바나나를 따 먹는 '단 한 마리의 미친 원숭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물에 젖지 않고 바나나를 먹는 모습을 보여줄 때(성공 사례의 증명), 비로소 집단의 낡은 알고리즘은 깨진다.



문헌정보학은 과거의 기록을 보존하지만, 죽은 기록을 숭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록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쓸모없는 정보는 폐기(Weeding) 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원래 그랬어", "남들도 다 그래". 이 말들이 들릴 때가 바로 의심해야 할 때다. 그 규칙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가? 그 물줄기는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가?


나는 시각장애인 연구자로서 계속해서 사다리에 오를 것이다.

사람들이 "장애인은 할 수 없어", "위험해"라고 말리며 관습의 주먹을 휘두를지라도.

나는 확인해야겠다. 정말로 찬물이 쏟아지는지, 아니면 저 바나나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유 없이 맞는 매라면, 맞으면서 증명하겠다. 이제 물은 멈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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