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의 이름이 흐르는 해협

스카이 섬의 끝자락과 집단 기억의 아카이브

by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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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소를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 인지하지만, 문헌정보학적 관점에서 장소는 그 자체로 거대한 텍스트이자 기록의 집합체이다. 마봉 드 포레 작가가 전하는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의 마지막 여정, 브로드포드와 카일라킨의 풍경은 이름 속에 박제된 역사와 변방의 기록이 어떻게 현대의 여행자에게 읽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명에 새겨진 데이터 : 지명학(Toponymy)과 패배의 기록


스카이 섬의 마지막 보루인 카일라킨(Kyleakin)은 그 이름부터가 하나의 역사적 데이터베이스이다. 1263년 노르웨이의 하콘 왕이 대함대를 이끌고 이 해협을 지났으나, 결국 라르그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서사가 '하콘의 해협(Kyle of Håkon)'이라는 지명 안에 고착되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는 사상 최대의 물류 프로젝트가 '미스 커뮤니케이션'과 '기상 악화'라는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로 인해 파산한 사례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오답 노트' 같은 지명이겠지만, 스코틀랜드에게는 승리의 메타데이터를 보존하는 효율적인 방식이다. 킹 하콘 바(Bar)의 간판에서 술에 취한 바이킹을 그려 넣은 유머는 비극적인 역사를 소비 가능한 문화적 텍스트로 재구성하는 집단 기억의 가소성을 보여준다.



정보의 우선순위와 언어의 아키텍처


스카이 섬의 도로 표지판은 본토와 다른 독특한 정보 체계를 가지고 있다. 영어가 우선인 본토와 달리, 이곳은 게일어(Gaelic)가 영어보다 상단에 배치된다. 이는 지식 조직론(Knowledge Organization) 측면에서 정보의 우선순위가 정체성과 직결됨을 시사한다.


비록 관광객들에게는 낯선 텍스트일지라도, 게일어를 전면에 배치하는 행위는 이 지역의 문화적 주권을 선언하는 일종의 인덱싱(Indexing) 작업이다. 80%가 넘는 행인이 같은 방향을 볼 때 군중심리가 발동한다는 밀그램의 실험처럼, 표지판의 언어 배열은 그 지역 공동체가 무엇을 '본질'로 규정하는지를 끊임없이 암시하며 구성원과 방문자의 시선을 통제한다.



헤브리디즈의 고립과 정보 접근성의 물리적 한계


이너 헤브리디즈에서 아우터 헤브리디즈로 넘어가는 경계는 단순한 지리적 구분을 넘어 '세상의 끝'이라는 서사적 단절을 의미한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이 척박한 섬까지 찾아온 여행자들의 고행은 정보의 가치가 희소할수록 그 접근에 소요되는 물리적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함을 증명한다.


비에 젖은 낡은 호텔의 지붕 밑 방이나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의 성터는 이용자 경험(UX) 측면에서는 최악의 인터페이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편함 자체가 '헤브리디즈'라는 텍스트의 본질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속성이 된다. 1995년 스카이 브리지가 생기기 전까지 페리로만 소통하던 물리적 단절은 이제 다리라는 보철을 통해 연결되었으나, 아우터 헤브리디즈의 고독은 여전히 '세상의 끝'이라는 강력한 브랜드로 남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브로드포드의 바닷가에 핀 계란후라이 같은 데이지꽃과 킹 하콘 바의 자조적인 유머는 거친 자연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조직하고 보존하는지 보여준다. 역사는 승리자만을 기록한다고 하지만, 카일라킨의 해협은 패배자의 이름조차 훌륭한 지역 아카이브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비록 직접 가보지 못한 세인트 킬다 섬이나 아우터 헤브리디즈의 황량함일지라도, 누군가의 정성 어린 기록(텍스트)을 통해 우리는 그곳을 상상하고 공유한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남은 가장 쓸쓸한 장소는 어떤 이름으로 인덱싱되어 있는가? 혹시 그곳 역시 누군가의 처절한 패배나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깃든 '초월적 공동체'의 일부는 아닌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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