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 담긴 지리적 메타데이터

탈리스커 증류소와 스코틀랜드의 보랏빛 유산

by 김경훈

https://brunch.co.kr/@mabon-de-foret/284


우리는 정보를 주로 텍스트나 데이터로 수용하지만, 때로는 액체 한 잔이 수만 페이지의 보고서보다 더 정교한 지역의 정보를 담고 있다. 마봉 드 포레 작가가 전하는 스카이 섬의 탈리스커 증류소 견학기는 단순한 술맛의 품평을 넘어, 장소의 기억이 어떻게 물질로 전이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특히 이론적인 나열이 아닌, 현장의 비바람과 바다 냄새가 섞인 작가의 생생한 경험담은 정보학적 관점에서도 매우 가치 있는 '현장 데이터'라고 할 수 있다.



탈리스커: 바닷바람과 토탄이 빚어낸 액체 아카이브


스카이 섬 유일의 전통 증류소인 탈리스커(Talisker)는 지리적 특성이 품질을 결정하는 '테루아(Terroir)'의 전형을 보여준다. 쿠일린 산맥에서 내려오는 미네랄 풍부한 물과 해안가 증류소 특유의 염분 섞인 습기는 위스키라는 정보 저장소에 고스란히 각인된다. 작가의 설명처럼, 보리를 건조할 때 태우는 피트(토탄)의 연기는 그 지역의 지질학적 역사를 훈연 향으로 변환하는 지적 공정이다.


스카이 위스키는 말 그대로 스코틀랜드의 규제라는 빡센 알고리즘을 통과해야만 그 이름을 쓸 수 있다. 3년 이상의 숙성, 40도 이상의 도수, 그리고 첨가물 제한이라는 엄격한 '데이터 정제 과정'은 스카치위스키가 세계적인 신뢰를 얻는 기반이다. 작가는 하이랜드부터 아일라까지 여섯 가지 위스키 지역 구분을 이론이 아닌 실제 현장감 넘치는 언어로 풀어냈다. 이는 복잡한 지식 조직론적 분류를 이용자의 맥락에 맞춰 재해석한 훌륭한 정보 큐레이션이다.



슬리가한의 다리: 전설과 현실이 만나는 인터페이스


카보스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슬리가한(Sligachan)은 블랙 쿠일린 산맥의 관문이자, 전설이라는 비가시적 정보가 현실의 풍경과 충돌하는 지점이다. 오래된 돌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에 얼굴을 씻으면 젊어지고 온몸을 담그면 청춘을 얻는다는 요정의 전설은 장소에 부여된 상징적 메타데이터이다.


정보학적으로 보면, 슬리가한의 다리는 거친 산맥(데이터의 원천)과 인간의 마을(이용자 환경)을 잇는 인터페이스이다. 작가가 구두를 신고 트레킹을 시도했던 에피소드는 적절하지 않은 장비(보철)로 험난한 정보의 지형에 접근할 때 겪는 물리적 한계를 유쾌하게 보여준다. 진창에 무릎까지 빠질 뻔한 경험은 때로는 지식보다 현장의 물리적 조건이 더 우선시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히드(Heather): 척박한 대지에 인덱싱된 보랏빛 기록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진정한 주인공은 엉겅퀴가 아닌 히드꽃이다. 바람이 거세고 땅이 척박한 곳에서도 낮게 엎드려 피어나는 히드는 스코틀랜드라는 텍스트의 배경색을 결정한다. 일반 히드와 벨 히드로 나뉘는 이 작은 들꽃들은 황무지를 보라색과 갈색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이며, 그 땅이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지를 시각적, 후각적으로 기록한다.


꽃이 진 다음에도 마른 관목처럼 남아 대지를 덮는 히드의 모습은 정보의 보존과 소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넓게 퍼져 풍경 전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히드는 낱개의 정보보다 그 정보들이 모여 형성하는 '분위기'와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마봉 드 포레 작가의 여행기는 위스키 증류소의 굴뚝 연기부터 발밑의 히드꽃까지, 스카이 섬이라는 거대한 아카이브를 오감을 통해 복원해 냈다. 특히 위스키의 복잡한 계보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해 준 덕분에, 딱딱한 이론서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스코틀랜드의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정보 또한 위스키처럼 긴 시간의 숙성과 독특한 환경의 결합이 필요하다. 오늘 당신이 경험한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은 지금 당장은 톡 쏘는 알코올처럼 거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스페셜티 위스키로 성숙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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