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억 명을 묶은 공통 소스 코드의 비밀

by 김경훈

세상에는 참 끈질긴 데이터가 있다. 수천 년 전에 코딩된 '말(言)'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대륙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지금 우리 스마트폰 키보드 위까지 살아남아 있다면 믿어지는가? 언어학자들이 라틴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현대 유럽 언어들 사이의 소름 돋는 유사성을 발견했을 때,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강제적인 '시스템 업데이트'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28개 국어를 해독한 '인간 DB'와 사라진 소스 코드


18세기 말, 캘커타의 판사였던 윌리엄 존스는 요즘으로 치면 ‘괴물 같은 사양’을 가진 인간 데이터베이스였다. 13개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고 28개 언어를 해독하던 그가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라틴어의 연결 고리를 찾아냈을 때, 언어학계는 거대한 공통 조상 서버의 존재를 직감했다.


이후 토머스 영이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용어를 처음 정의하며 내놓은 가설은 꽤나 도발적이었다. 하나의 발상지에서 나온 단일 민족이 이웃 민족들을 차례로 '해킹'하고, 자신들의 언어라는 OS를 강제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건 평화로운 정보 공유라기보다는 압도적인 하드웨어를 앞세운 강제 시스템 통합에 가까웠다.



철기(Iron)와 전차(Chariot): 하이엔드 하드웨어의 습격


역사학자들이 재구성한 인도유럽 공통 조어(PIE) 사용자들의 정체는 꽤나 '힙'하고도 무시무시하다. 터키 북부 혹은 스텝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당시 다른 민족들이 구리나 청동기라는 구형 모델을 쓰고 있을 때, 이미 철광석 제련이라는 하이엔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식량이 아닌 '엔진'으로 활용해 병거를 끄는 전술까지 개발했으니, 이건 뭐 돌도끼 든 상대 앞에 탱크를 몰고 나타난 격이다. 이들은 전쟁을 숭상하며 인근 민족들을 무찌르고, 그들의 언어 체계를 자신들의 조어(祖語)로 덮어쓰기(Overwrite) 해버렸다. 히타이트, 리디아 같은 고대 언어들이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배경에는 이런 비정한 데이터 포맷의 역사가 숨어 있다.



업데이트를 거부한 '독립 서버'들: 핀족과 바스크족


재미있는 건 이 거대한 강제 마이그레이션 속에서도 끝까지 '순정 OS'를 고집하며 버틴 민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핀족, 에스토니아족, 그리고 바스크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언어 아카이브를 보존해냈다. 정보학적으로 보자면, 거대 플랫폼의 독점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프로토콜을 유지해온 '독립형 보안 서버'인 셈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25억 명이 인도유럽어족의 후예로 묶여 있다. 우리가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라틴어 어원을 추적할 때 느끼는 그 묘한 기시감은 수천 년 전 철기 문명을 휘두르며 대륙을 휩쓸었던 조상들의 공통 소스 코드가 우리 뇌세포 속에 여전히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언어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승자가 패자에게 남긴 가장 강력한 데이터의 낙인이자 인류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정보 아카이브다. 수천 년 전의 철기병들이 지금의 디지털 리터러시 시대를 본다면 과연 뭐라고 말할까? 아마 그들도 이 거대한 데이터 연결망 앞에선 혀를 내두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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