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망치와 인터폰의 이중주

by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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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파트 거주자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 대신 층간소음 신고서 하나쯤은 품고 산다. 하지만 EAST 작가님은 달랐다. 윗집에서 축구를 해도 좋다는 광야 같은 포용력을 보여주며 성인 군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 칼럼은 그 거룩한 호의가 어떻게 뒷목 잡는 반전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한 유쾌한 기록이다.



축구장 개장 선언과 비극의 서막


윗집 젊은 엄마가 음료수를 들고 왔을 때 작가님은 쿨하게 외쳤다. 애들이니까 뛰는 게 당연하다. 축구를 해도 된다. 이 한마디는 윗집 아이들에게는 천국행 티켓이었고 작가님에게는 고행의 길이었다. 하지만 작가님은 몰랐다. 자신이 허락한 것이 아이들의 발소리뿐만 아니라 윗집의 끝없는 의심과 인터폰 소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윗집의 명탐정 코난 빙의 사건


어느 날부터 거실 인터폰이 낯선 멜로디를 뽑아내기 시작한다. 윗집 엄마는 미안함 대신 의심을 들고 왔다. 관리사무소에 신고한 게 당신 아니냐는 고음의 추궁은 작가님을 당황하게 만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번에는 층간소음 안내문이 적힌 종이를 들고 나타나 범인 찾기에 나선다. 작가님은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느새 윗집의 상상 속에서는 옹졸한 신고꾼이 되어 있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여기서는 호의가 계속되니 의심의 거름이 된 셈이다.



발망치의 진실 혹은 거짓


결국 작가님은 폭발한다. 다시 울린 인터폰을 향해 작가님은 그동안 아껴둔 팩트 폭격을 날린다. 애들이니까 뛰는 게 당연해서 참아준 것이지 소리가 안 들려서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발망치 소리가 똑똑히 들린다는 선언은 윗집의 근거 없는 의심을 잠재우는 강력한 한 방이었다. 무조건적인 착한 이웃 코스프레보다는 적절한 때에 내지르는 사자후가 관계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터폰은 잠들고 발소리는 깨어 있고


전쟁 같은 인터폰 공방전이 끝난 후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윗집의 발망치 소리는 여전히 작가님의 천장을 두드리고 있다. 하지만 작가님은 이제 속이 시원하다.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비결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 참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위트 있게 인지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작가님의 거실에는 아이들의 활기찬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다만 인터폰만큼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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