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죽음은 우리들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무뎌진다는 믿음은 착각일 뿐 내게서 가까운 죽음, 그렇지 않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지난 세밑에 일어난 삼십 대와 사십 대 남성 가장의 죽음은 뜻밖에 마음에서 아주 가까운 그것이 되었다. 그들의 삶이 내가 관통하고 있는 삶의 여정과 엇비슷한 지점에서 갑자기 끝났기 때문일 테다.
그러면서 문득 사유의 귀착점에 섰다.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몇 곱절 중요한 것이구나. 어떻게 태어나느냐는 것도 당연히 결정적이다. 요즘 국제 정세 같아선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는 새삼스럽지만 치명적 조건이다. 경제적 여건도 무시할 수 없다. 각종 광물 재질로 만든 숟가락에 빗댄 출생 신분 타령이 공연한 유행은 아니다. 성별, 신체장애의 유무 등 영혼과 자아의 그릇인 육체적 조건도 한 사람의 인생을 출발점에서 결정한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어떻게 죽느냐구나. 입술 위아래를 맞대어 일자로 만든다. 손바닥 하나로 뺨부터 턱 끝까지 쓸어내린다. 그렇다, 어떻게 죽느냐가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하다. 경제학 용어 중에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는 것이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논리다. 사람의 기억은 가장 극적인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국한되며 전반적은 과정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부연이다. 인생 역시 시작은 불행했어도 끝에 행복했다면 전체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당연히 크게 증가할 것이다.
소박한 듯 창대한 꿈을 가슴에 품는다. 나는 잘 죽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서 그들의 사랑을 느끼며 마지막 날숨을 뱉으면 좋겠다. 영화처럼 채광 좋은 창가에 붙은 하얀 침대에서 잠드는 듯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죽음은 그야말로 완벽한 것이리라.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이 들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깊은 병, 그것도 아니면 내 의지가 아닌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마지막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작별의 순간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 스스로 종료 버튼을 누르는 일은 없기를 절대자에게 기도한다.
생업과 관련한 일로 마음이 어지러운 세밑과 벽두를 지나고 있다. 불교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단다. 생의 고난이 닥쳐올 때 남을 탓하는 이는 아직 길을 나서지 못한 이이고, 자기 탓으로 돌리는 이는 중간쯤 온 이이며, 아무도 탓하지 않는 이는 이미 도착해 있는 이이다. 석가의 가르침은 불자가 아닌 나에게까지 자비를 베푼다. 생의 끝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삶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날까지 오늘도 한 걸음씩만 걸어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