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나와 아내, 중학생 딸까지 세 식구가 밥상 앞에 모였다. 정확히는 밥 아니고 치킨이다. 손 대충 씻고 닭다리 하나 집어 드는 아이가 말한다. “엄마 아빠, 나 아까 학교 끝나고 나오다 캐스팅 제의받았어!”
누가 뭘 받았다고? 아내가 다시 물었다. 하굣길 정문을 통과해 나오는데 웬 언니가 달려오더란다. 공익광고나 기업 이미지 광고에 나오는 학생 출연자를 캐스팅하는 기획사에서 나왔는데 학생이 찾는 얼굴과 맞는 것 같다고 하더란다.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면 좋겠고 부모님 놀라실 테니까 잘 설명해 달라고 했다나. 위 학년에 잘생긴 걸로 전교에 유명한 오빠도 연락처를 받아갔단다.
아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딸이 그 정도는..”까지 말하다 말꼬리를 흐렸다. 다행히 아이가 엄마 말을 제대로 못 들은 눈치다. 아내는 아이에게 그 회사에서 너한테 다시 연락이 오면 엄마 전화번호를 알려주라고 당부했다. 네 아빠가 마침 방송사에서 일하니까 더 알아볼 수 있을 거야, 하는 통에 갑자기 숙제가 생겼다.
다음날 오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기획사 직원과 통화했단다. 미리 들었던 대로 주말쯤 카메라 테스트 보러 오면 좋겠다고 했단다. 아내는 조금 더 고민해 보고 회신해 주겠노라 했단다. 아내 말하길, 나름 인터넷 홈페이지도 있고 기사도 실렸으며 서울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회사다. 그래도 뭔가 미심쩍으니 아빠가 꼼꼼하게 알아보란다. 숙제의 시작이다.
친한 예능 피디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메신저로 말을 걸었고 선배가 반응한다. “형, 부탁이 있어요. 저희 애가 청소년 에이전시 직원이라면서 카메라 테스트 제의를 받았대요. 아이 엄마가 먼저 통화를 했는데 기획사 이름이 OOOO고요. 믿을 만한 곳인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바로 응답이 수신됐다. 가까운 연예인 매니저들 통해서 알아봐 주겠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우리 딸이 정말 그 정도 되는 외모인가? 내 딸이긴 하지만 김태희, 고소영 같은 미모인지는 모르겠는데. 아, 요새는 고윤정, 김고은 여배우쯤이어야 할까. 나 닮아서 키가 작은데. 가만, 그래도 비율은 나쁘지 않잖아. 얼굴 작고 다리 길어서 사진만 보고는 사람들이 키 큰 줄 알잖아. 이목구비도 베이스는 아빠 얼굴이지만 엄마 유전자가 섞여서 그래도 최대 아웃풋 아냐?! 무엇보다 애가 단정하고 반듯하게 생겼잖아. 공익광고, 기업 광고라고 그랬나? 그런 거면 적절한 캐스팅 시도일 수 있지. 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선배 답장이 왔다. “친한 매니저 후배에게 물어봤어. 회사 이름 자체는 생소하대. 그런 곳 열 군데 중 여덟아홉은 먼저 카메라 테스트를 할 거래. 마스크가 아주 좋다, 합격이다 해놓고 근데 애가 준비가 전혀 안 돼서 현장에 보낼 수가 없다, 아무래도 연기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면서 연계된 학원을 권할 거라네. 6개월 학원비가 삼사백 정도 한대. 그게 끝이 아니라 프로필 사진 찍고 이것저것 레슨 시키고 돈이 끝없이 들어간대. 결국 학원비 장사하거나 거간꾼 노릇 하는 거지. 찍어놓은 프로필 사진 돌리다가 우연찮게 진짜 캐스팅되면 소개비 떼고 출연시키고 그나마 요즘은 불경기라 제작 현장도 많지 않대. 열심히 돈 들이다가 출연해 봐야 엑스트라일 확률이 높고.” 정성스러운 장문의 메시지다.
나는 회사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스트레이트 포워드(straight forward)’하다. 아내가 불러준 회사 이름의 대표 번호를 검색하여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이 받는다. 카메라 테스트 제의받은 어느 학생 부모다, 순수하게 캐스팅이 목적이냐, 아니면 학원이나 레슨 연계가 목표냐, 우문이겠지만 솔직하게 답해 달라. 몇 차례 녹음기 같은 답변을 반복하던 직원은 이내 윗사람을 바꾼다. 실장 직급이라는 남자가 받았다. “아버님, 아시겠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촬영장에 갈 순 없습니다. 광고주나 연출진도 준비된 신인을 찾고요. 저희가 직접 학원을 운영하진 않습니다만 연결해 드릴 순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등록된 청소년들에게 연예인을 목표로 하라고 지도하지 않습니다. 아버님 말씀처럼 헛바람 드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듣고 통화를 종료했다.
결론이 나왔다. 가지 말자. 예능 피디 선배가 알아봐 준 것이 큰 참고가 된 것은 분명하다. 결정적인 건 내가 통화한 내용이다. 연예인 꿈꾸지 말라고? 큰 목표도 없이 그럼 비싼 돈 들여서 그쪽 일은 왜 시작하라는 거야. 모두가 슈퍼스타가 될 순 없겠지만 기왕에 시작한 거 꿈이라도 커야 중간쯤이라도 갈 거 아냐. 헛물켜지 말라는 소리 할 거면 아예 건실한 다른 꿈을 좇으라고 하는 게 현실적이지. 너희들은 기껏해야 이름 없는 단역이나 엑스트라가 될 재목들이야, 이런다는 거야? 그럼 애초에 그런 일 알아봐 주는 회사며 학원은 왜 필요한 건데? 인터넷 홈페이지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예쁘게 화장시킨 딸아이 또래 청소년들 프로필 사진이 잔뜩이다. 처음엔 그럴듯하게 보인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순진한 아이들 꿈 파먹고 사는 회사네. 저들 중에 나중에 대단한 스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작은 누구나 미약하니까. 그런데 아이들한테 연예인을 목표로 하지 말라고 지도한다고? 그건 또 무슨 앞뒤 안 맞는 소리인가. 타인의 꿈에 기생하면서 그 꿈을 너무 오래 꾸어서도 안 되고 금세 깨어나서도 안 되는 비즈니스 모델이라니. 게다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카메라 테스트 한 번 받으러 오라는 솔깃한 말에 마음이 부풀어 찾아갔다가 생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길을 잃는 아이와 부모가 그동안 몇이나 있었을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하루 이틀 사이 달콤한 꿈에 이끌리는데 거칠게 흔들어 깨우는 엄마 아빠가 원망스럽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그렇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해주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야 내 길은 그쪽이 아니구나, 할 테니 말이다. 한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친구들한테 듣고 인터넷으로 알아봤는데 결국 학원 연결해서 돈 버는 회사들 이래. 뭐 그래도 자기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학생들한테는 접근하지 않을 테니 그 기분 느낀 걸로 됐어. ㅎㅎ. 중간고사 공부나 해야지.”
사람은 간사하다. ‘우리 딸이 무슨 길거리 캐스팅?’ 이랬다가 ‘뭐 인물이 아주 못나진 않았지’, 이렇게 바뀌고 ‘연예인 돼서 엄마 아빠한테 효도하는 건가’, 까지 생각이 미친다. 아주 찰나였지만 헛물켠 건 어쩌면 아이가 아니라 나였을는지 모른다. 회사는 바로 그 점을 포착해서 공략하고 사업화했을 것이다. 돈 버는 사람들은 머리가 비상하다. 다만 그것이 누군가의 시행착오, 불행과 바꾼 것이면 곤란하다. 수익 모델을 만드는 능력은 부럽지만 내가 갈 길이 아닌 것 역시 잘 안다. 우여곡절 끝에 본래의 패밀리 라이프로 돌아온다. 아이 스스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다 키운 것 같다.
아내가 ‘광 클릭’ 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기숙사 달린 고등학교 입학 설명회 참가 신청에 성공했다. 주말에 아이와 함께 나들이 삼아 둘러보고 오잔다. 아이도 싫지 않은 눈치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이런 학교도 있구나, 직접 보고 와. 아내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을 물가에 데려가도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 뭐든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야 된다고 믿는다. 돌아오는 주말,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세상 주인공 같은 포즈는 취하지 못하게 됐지만 자신의 삶을 또박또박 걸어갈 아이를 조용히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