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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pr 19. 2024

나의 회식을 망치지 말아요

<14주차 임상 기록>

  나는 회식을 좋아한다. 모여서(會) 먹으니(食) 이 얼마나 즐거운가. 게다가 남의 돈, 그러니까 회삿돈. 공짜 좋아하면 민머리 된다지만 콩알만 한 월급 이상으로 조직에 기여하는 우리 아닌가. 엄밀히 얘기하면 응당한 보상이다. 육고기며 물고기에 맑고 노란 술까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다. 내가 회식을 선호했던 진짜 이유는 이렇다. 그 자리에서 만큼은 서로 아귀다툼하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나 나나 가여운 이 땅의 을(乙), 노동자, 가장, 자식, 집집마다의 소중한 희망의 결정체로서 마주할 수 있는 귀한 찰나다.


  어제 회식은 나의 취향을 무참히 배반했다. 식당이나 메뉴 선정의 잘못 같은 게 아니다. 참, 어제는 값어치 없는 양보심 따위 발휘하지 않았다. 구석 불편한 자리로 앉지 않고 적당히 맞춤한 데에 앉았다. 일전에 팀 동료들과 비슷한 식사 자리가 있었다. 나름대로의 배려심, 거창하게 희생정신으로 말석에 앉았더니 동냥 밥 먹는 듯한 굴욕감이 돌아왔다. 아내가 그런 것도 고마워해주는 사람들한테나 하라고, 다음에는 오빠부터 챙기라고 당부했다. 나는 아내 말을 잘 듣는다.


  어제 일진이 심상찮더라. 부서 이동에 적응이 좀 됐는지 살이 다시 붙는다. 푸성귀 따위로 점심 끼니를 대신할 요량으로 구내식당에서 샐러드를 포장해 왔다. 탕비실에서 샐러드드레싱 봉지를 뜯는데 사방으로 비산하며 새 셔츠를 망쳤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가. 회식 자리에서 나이 많은 팀장이 시종일관 팀원들 인사 평가 얘기를 놓지 않았다. 자기 인사 평가 원칙이 어떻고, 제도에는 없지만 매달 팀원들 평가 등급을 매기고 있고, 상반기 인사 평가가 얼마 남지 않았고, 팀원들에게 대체로 아쉬운 부분은 어떤 것이고, 이대로 라면 팀원들 평가가 어떻게 될 것이고, 등등. 일단 상반기 평가가 목전도 아니다. 아직 두 달이나 남았다. 굳이 신성한 회식 자리에서까지 평가 운운했어야 되나 이 말이다.


  시종일관이라고 했지만 온전히 일관성 있지도 않았다. 휘하에 팀원 다 합쳐야 고작 넷이다. 신생 부서인데 일거리는 산더미다. 조직은 하릴없이 기능을 추가하지 않는다. 새 팀이니까 처음 달리는 기차처럼 레일도 손수 하나하나 놓아가며 나아가야 한다. 사실상 팀원 각자가 일당백 하는 중이다. 막내가 마흔 살 과장이다. 모두 베테랑이니까 겨우 가능한 일이다. 팀장도 그걸 모르진 않는다. 자기만 독점하는 발언 시간 중에 얼마 없는 팀원들 노고가 크다는 말로 시작해 놓고 말끝에는 거듭 평가가 어떻고 이 ㅈㄹ이다. 그래서 잘한다는 건가, 못한다는 건가. 격려든 질책이든 둘 중에 하나만 하라 이 말이다.


  최악은 이제부터다. 술이 좀 더 들어가니 팀장이 취기가 오른다. 이제 아주 앉은자리에서 당장 평가 결과를 풀어놓는다. 아무개 팀원이 저무개 팀원보다는 이런 게 낫고, 그무개 팀원은 요무개 팀원에 비해 이 점이 떨어지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는다. 나머지 네 사람 고갯짓 너머의 세상에 저마다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을 오직 술 취한 그만 모른다. 가뜩이나 포커페이스 안 되는 나는 썩어가는 표정이었을 테다. 기초 교육이 이래서 정말이지 중요하다. 국민학교 때 그 흔한 황희 정승 에피소드, 검은 소 누렁 소의 밭 가는 기량도 귓전에서는 겨루지 않았다는 교훈을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인과의 연유가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어떤 사소한 행동도 하루아침에 맥락 없이 실현되지 않는다. 듣자 하니 이렇다. 나이 많은 팀장은 아주 오래전 잠시 팀장을 맡았다가 업무 과실에 의한 문책성으로 ‘면팀(팀장 직위를 벗음.)’했다. 지난한 고초를 견딘 끝에 사실상 제대로 첫 팀장을 맡았다. 저도 모르게 도취되고 그만큼 부담도 있을 것이다. 팀원들은 모두 마흔 줄 이상 고참들이다. 리더의 권위를 인정받기가 간단치 않다. 리더십이 취약한 리더는 자신이 가진 권력부터 손쉽게 내세운다. 회사 조직에서 얼마 안 되는 팀장의 권력 중엔 상하반기 인사 평가가 그나마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고깃집을 나와 2차로 옮기는 와중에도 그는 팀원 평가를 들먹였을 것이다. 손쉬운 방책은 현명한 해법일 수 없다. 회사 생활 할 만큼 한 베테랑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인사 평가를 거론하는 것만은 말았어야 한다.


  타산지석은 인류 모두가 새겨야 할 잠언이다. 팀장의 혼란스러운 일관성을 경험하며 나의 지난 시간을 반추했다. 지난해까지 내가 팀장일 때에 우리 팀원들도 여느 회식 자리에서 오늘의 나 같은 순간은 없었을까. 그들 앞에서 한 줌 권한에 도취되고 매몰되어 위협에 가까운 언사를 흘리지는 않았는지 골똘히 되새김해보았다. 적어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미심쩍으면 지금이라도 옛 팀원에게 누군가 물어보랄 수도 있는데, 그것만은 자신 있는데, 참말로 그러한데 싶었다. 일과 시간 중엔 세상 엄혹한 팀장이어도 적어도 잘 없는 회식 자리에선 어지간하면 ‘공장 얘기’ 하지 않았다. 덕장이 아닌 잘못을 소주 한 잔에 따라 뭉근히 내밀곤 했었다. 따뜻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회사만 아니면 어디 학교 선후배쯤으로 만나서 일로 만난 사이만 아니라면 세상 가까운 지간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애먼 운명을 탓했다.


  유일한 순기능이 있었다. 데면데면했던 팀원들과 덕분에 반걸음 가까워졌다. 공공의 적은 필요악일는지 모른다. 빌런이 나타나면 어벤저스는 자생적으로 결성된다. 식당을 나서며, 2차로 옮기는 사이, 해산하기 전에 팀원들과 공통된 감상을 낮은 데시벨로 공유했다. “아 쒸, 저 양반 왜 저래.”, “오늘 회식 영 재미없는데요.”, “차라리 야근을 합시다, 술자리가 뭐 이래.” 하는 볼멘소리들이 전우의 유대를 만들어줬다. 팀장의 계산 밖에 있던 값진 사이드 이펙트다. 회식을 파하고 각자의 홈 스위트홈으로 향하면서 팀원들과 오늘 모두 수고하고 애썼다는 인사로 흩어졌다. 어느 때보다 진심인 인사말이었다.


  평가에는 상향식 평가라는 것도 있다. 오늘 팀장의 회식 기획을 평가하자면 내 점수는 낙제 등급이다. 회식의 전부가 공짜 밥, 공짜 술이었다면 나는 진즉에 빛나는 광활한 이마를 가졌을 것이다. 그는 고기들 많이 먹으라 간단히 권해놓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아니었다. 얼마 없는 우리 팀원들이 하나같이 애쓰고 탁월한 능력 덕분에 그럼에도 차근차근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오늘 저녁만큼은 골치 아픈 일 얘기일랑 치워두고 좋은 음식 먹으면서 따뜻한 시간 가져보자, 자 수고한 여러분들 한 잔씩 받으셔라, 지화자! 시종일관 이랬어야 마땅하다. 리더의 권위는 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스스로 앞세울수록 뒷걸음질한다.


  회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지켜 달라. 가뜩이나 MZ세대들의 맹공으로 회식은 직장인 낱말 사전에 점점 더 없는 이 돼간다. 멸종 위기의 그것을 나 하나라도 보존하고 싶은 애달픈 마음을 헤치지 말아 달라. 언제고 까슬한 모래 바람 부는 회사 생활에서 귀하게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회식을 다시 꿈꾼다. 어쩌면 오늘 불씨 같은 동료애를 확인한, 아직은 깊이 알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까지 페어 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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