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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pr 26. 2024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15주차 임상 기록>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간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지. 이따금 현재 진행형은 아니라고 느낄 때마저 있다. 그럴 때면 얼마나 ‘사랑받았던’ 사람인지라도 다시 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고된 세상 살기가 손톱만큼은 의미 있어지기 때문이다.


  두 살 터울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는 맞벌이로 회사에 다녔다. 지금처럼 제대로 된 육아 휴직 제도도 없던 시절이다. 엄마는 몇 달 겨우 쉬고 다시 출근해야 했다. 갓난쟁이인 나는 엄마의 친정,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다행히 엄마 아빠 집(나는 ‘우리 집’이라는 말 대신 어려서 그렇게 불렀다.)에서 멀지 않았다. 엄마의 친정 집은 내가 태어나면서 나의 관점과 발음 편의를 반영하여 ‘할먼네’가 되었다.


  그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말고 엄마의 오빠인 큰삼촌, 여동생인 이모 둘도 함께 살았다. 큰 이모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걸을 수 없는 장애가 생기고 말았다. 가느다란 다리로 종일 앉아서 지내는 큰 이모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그때 나는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작은 이모는 취직해서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다녔다. 지금도 있는 여성 의류 브랜드의 매장 점원으로 오래 일했다.


  엄마 아빠뿐 아니라 그야말로 온 가족이 나를 키웠다. 첫 조카인 나를 이모 둘은 끔찍이 돌보았다. 처음엔 엄마 아빠가 갓난아기인 나를 아침에 맡기고 퇴근길 저녁에 찾아왔었다. 그러다 내가 말을 배우고 의사 표현을 하면서 엄마 아빠 집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이러다 아들 빼앗기는 거 아니냐고 엄마에게 공연한 걱정을 드러냈단다.


  할먼네에서 자는 날은 출근하는 작은 이모가 나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어느 날은 점심 먹고 집에 가고 다른 날은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면 걸을 수 없는 이모가 다섯 살짜리 조카를 요리조리 원격 조종하여 찬장과 냉장고, 밥솥에서 끼니 할 것들을 준비시켰다. 보리차 물에 시원하게 만 밥을 한 숟가락 뜨면 이모가 손가락으로 잘게 찢어 신 김치를 올려주었다. 다른 반찬 없어도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큰 이모랑 동화책도 읽고 이모가 좋아하는 라디오도 듣고 그림도 그리다 보면 어느새 창문이 붉게 물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저녁밥을 짓는다. 때마침 큰 이모는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응, Hoon이 오늘도 여기서 저녁 먹일게.” 동그란 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아홉 시 뉴스가 시작할 때쯤 퇴근한 작은 이모가 돌아온다. 텔레비전에서는 점잖은 남자 어른 목소리로 “어린이 여러분, 이제 꿈나라로 갈 시간입니다.” 하는 방송이 들렸다. 그때부터가 진짜 재미난 시간이라는 힌트인 것 같아 나는 좀체 잠들 수 없었다.


  씻고 나온 작은 이모가 할머니가 다시 차려준 늦은 저녁밥을 먹는다. 머리에 수건을 똬리처럼 얹고 회사에 메고 갔던 가방을 가져와 연다. “Hoon아, 이모가 너 주려고 이거 갖고 왔다~. 자, 얼른 먹어.” 이모는 비닐봉지 안에 든 빵 하나와 200 밀리리터 짜리 작은 흰 우유팩을 꺼냈다. 빵은 날마다 바뀌었다. 동그란 단팥빵이나 네모난 카스텔라, 길쭉하여 땅콩 고명이 올라간 크림빵, 아니면 노란 슈크림 빵이었다. 저녁밥을 배부르게 먹었지만 게 눈 감추듯 없어졌다. 두 이모에게 한 입씩 권했지만 이모들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엄마 아빠 집에 가지 않고 할먼네에서 자는 까닭 중에 작은 이모가 주었던 빵과 우유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모가 저녁마다 가져오던 그 빵과 우유의 출처가 어디인지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이모끼리 얘기하던 것인지, 할머니에게 귀띔하던 것인지, 엄마가 물어 얘기하는 걸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디선가 들어 머리에 입력돼 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보통의 회사원보다 퇴근이 늦는 이모 직장에서는 오후 대여섯 시쯤 허기를 지우라고 간식이 나왔다. 빵 하나, 작은 우유 하나. 그것이 매일 다른 맛으로 즐기던 어린 나의 야식의 본래 용도였다. 모르지 않았으나 유년 시절의 나는 그것을 골똘히 사유해 볼 정도로 인지 능력이 발달하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그렇다.


  그때 이모 나이가 고작 스물서넛. 틈만 나면 시장기가 침범해 올 나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흔하지는 않았을 제과점 빵. 남들 저녁밥 먹을 시간일 테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또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그걸 언니가 나은 자식, 다섯 살짜리 조카 갖다 주겠다고, 맛있게 먹는 그 모습 보겠다고, 비닐봉지째 묶어 가방에 넣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 어린 이모를 상상하니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당연한 듯 내어주는 그 마음에 뒤늦게 마음이 벅차오른다. 열 달 배 아파 나 낳은 엄마라면 어쩔 수 없는 모정이겠다만 조카를 향한 이모의 사랑은 도대체 무어냐 이 말이다. 그것을 가리키는 낱말조차 세상에 없는, 또 하나의 위대한 사랑에 다름 아니다.


  걷지 못하는 큰 이모는 걸음이 씩씩한 이모부를 만나 사촌 동생인 딸 하나를 낳아 해로하고 있다. 어릴 때는 큰 이모를 빼앗아간 이모부가 그렇게 미웠는데 철들면서는 세상에 더 고마운 사람이 없다. 작은 이모는 나의 부친이 소개한 이모부와 만나서 남녀 사촌동생을 하나씩 낳고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살고 있다. 엄마가 가난한 글쟁이였던 아버지와 만나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에 두 여동생 때문도 있었다. 엄마는 걷지 못하는 동생을 번쩍 안아 어디든 동행하고, 어린 처제를 자신의 막냇동생보다 더 아끼는 그 마음이 이성으로서의 매력보다 값졌단다.


  가수 변진섭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구원의 손길 이전에 ‘우리가 대단히 사랑받았던’ 존재라는 기억일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되면, 내가 스러지면 나 자신보다 아파할 사람이 우리 마음 안에 분명히 있다. 그 사랑이 지금 실체로서 작용하지 않는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의 어느 시간 세상 무엇보다 뜨거웠던 그것이라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뜨겁게 사랑받았던 사람들이므로 저마다 귀하다. 유년 시절 이모의 가방 속에 애지중지 들어있던 빵 봉지, 그 달콤한 맛을 떠올리며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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