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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y 03. 2024

생전 안 하던 짓

<16주차 임상 기록>

  나는 대단히 아싸리한 성격이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싫고 듣는 건 더 싫다. 나는 나, 너는 너 각자 인생을 도모하면 그뿐이다. 직접 겪거나 나와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남 얘기하는 데 시간 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나 좀 잘 봐달라고 고개 숙이지도 않는다. 잘 없는 일이지만 누가 나한테 와서 그러는 것 역시 경계한다.


  올해 초, 함께 부문을 옮겨 인접부서로 발령 온 피디 선배가 새로 맡은 일로 보고서를 쓰는 데 애를 먹는다. 대체로 피디들이 그렇다. 문서 작업이라고 해봐야 새 프로그램 기획안 쓸 때가 고작이다. 그나마도 디테일은 후배 피디들이나 작가들 몫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회사원으로서의 기본 스킬은 점점 더 퇴화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드물게 나다. 회사 조직 안에서 인간적 유대를 쌓는 기술은 몰라도 페이퍼 워크 하나는 못 한다 하면 억울하다. 선배가 초안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내가 간단히 손봐주었다. 선배가 고마움의 표시로 점심밥을 샀다.


  “그 얘기 들었어?” 이 말로 시작하는 사연 중에 밝고 건강한 것은 희귀하다. 선배가 나에게 긴요한 첩보를 제공하는 듯 말을 꺼낸다. 얘기인즉, 이번 인사이동에서 내가 지난해까지 나의 상관인 부문장의 권유로 원래 지금보다는 더 권한 있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는데 누군가의 반대로 무산된 거란다. 지금 부문장이 휘하에 팀장들을 불러 의견을 구했고 다름 아닌 선배 부서의 팀장이 결사반대했단다. 실무 능력을 먼저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나. 선배는 그건 표면적 구실이겠고 무언가 더 있는 것 같다며 비장한 표정이 됐다. 그러면서 지금도 그가 내 흉을 그렇게 보고 다닌단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원한을 품은 계기. 몇 해 전 내가 이전 부서 팀장일 때 우리 팀원들을 중심으로 유관 부서 몇 사람이 함께 상을 받게 됐다. 어느 주말 운전하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운전 중에 받았더니 어느 부서 누구라며 수상자 명단에 자기네 부서 아무개가 빠졌다고 내게 항의했다. 뒤에 앉은 아내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갓길로 차를 세웠다. 나도 잔뜩 날을 세웠다. 그걸 왜 이 시간에 나한테 따지냐고, 명단은 내가 아니라 윗선 부문장이 썼다고, 그리고 엄밀히 그 부서 팀장도 아니면서 체계 무시하고 월권하시는 것 아니냐고 받아쳤다.


  그날 오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그와 마주쳤다. 대뜸 내 쪽에서 말을 걸었다. “팀장님,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 제가 부서 옮겨 와서 진즉에 청했어야 하는데 많이 늦었습니다. 워낙 공사다망하신 것 같아서.” 좀체 흰소리하는 일 없는 내가 불쑥 말을 걸었기 때문일까, 그가 화들짝 놀란다. “그, 그러시죠. 제가 지금은 뭘 좀 처리해야 돼서..” 뒷걸음질로 빠져나가려는 걸 옭아매 잡는다. 메신저 드릴 테니까 답 달라고 하고 기어이 약속을 만들었다.


  며칠 뒤, 회사 근처 횟집으로 그를 이끌었다. 메뉴 어떠시냐 물으니 그저 좋단다. 평소 오후에 수시로 얼굴 불콰한 것 보니까 점심에 반주깨나 즐기는 것 같았다. 낮술 곁들이려면 이보다 훌륭한 안주도 없지 싶었을 터. 두 손으로 모아 목표점을 가리키며 안쪽 상석으로 앉게 했다. 두 사람 몫의 점심 코스와 맥주 한 병, 소주 두 병을 주문했다. 곁들임 안주와 술병이 먼저 들어왔다. 소맥 폭탄주 두 잔을 얼른 만들고 한 잔을 손바닥으로 받쳐 내밀었다. 가볍게 고개 숙여 잔을 부딪치고 눈으로 확인하며 그보다 조금 적은 양을 마셨다.


  “팀장님, 너그러운 분이시니까 깡그리 잊으셨겠습니다만 제가 사과드릴 일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제가 이전 부서 팀장일 때 어느 주말에 전화 걸어온 적 있으십니다. 아마 회사에서 수고한 사람들 상을 주네 어쩌네 하던 때였는데 제가 팀장님께 공손하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사과받아주시고 노여움 푸시면 좋겠습니다.” 이 인간,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평시 표정을 찾으려고 애쓴다. “아휴, 뭐 다 지난 일을.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흐흐. 근데 그때 말이야 그게 어떻게 된 일이었냐면..” 갑자기 목이 타는지 그가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는다.


  술이 떨어져서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땐 내가 팀장도 아니었는데 우리 팀 아무개가 같이 상 못 받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었지, 하며 은근히 말을 놓는 그에게, 그러니까 왜 팀장도 아니었으면서 오지랖이었느냐, 당신 팀장도 가만히 있는 것을 상대도 잘못 골라서 내 상관 손에서 벌어진 일을 왜 공연히 나한테 주말 그 시간에 그랬던 것이냐, 그리고 당신네 팀원은 그냥 통상 업무한 것이어서 사실 대단할 것도 없었다, 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빈 술잔을 채워주고, 멀리 있는 안주를 집어 접시에 올려주고, 더러워진 물수건을 종업원을 불러 갈아주었다. 회사가 어떻고, 조직이라는 게 저떻고, 혼자만 득도한 듯한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태어나 처음 해본 일이다. 직접적 인사 권한, 회사 조직 내에서의 생사여탈권을 쥔 직속상관 말고는 없었다. 남의 비위 맞춰주려고 먼저 고개 숙이는 일. 그럴진대 찢어버리고 싶은 아가리에 귀한 음식 쳐 넣어 주려고 굳이 자리 만드는 일 같은 건 내 사고 범주에 없던 것이었다. 감각 기관을 동원하고 사지를 움직여 상대의 편의를 돌보는 건 차라리 쉽다. 외려 참을 수 없던 건, 인간으로서 인정하기 어려운 그의 개똥철학을 들으며 적절히 반응해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밥 먹으면서 선배는 그가 너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흉보는 게 한둘이 아니라고 덧붙였었다. 심지어 면전에서는 입안에 혀처럼 구는 부문장을 두고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더란다. 그런 사람 의견을 수용하는 상관은 또 무어냐 싶지만 인내할 수밖에. 젖은 종이 같은 물고기 살점을 씹으며 아내와 아이를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이 거라도 먹여야 네가 내 욕을 안 하고 다니겠지. 기실 본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 않는 사람이다. 사필귀정이라, 무릇 그릇된 것은 반드시 바른 것으로 돌아가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며 더디지만 정의는 기어코 승리한다고 믿는 탓이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 믿어서 나만 편하면 될 것이 아니더라. 나 때문에 가족의 평안에 균열이 가면 안 될 일이다. 이가 갈리지만 옮겨 온 회사 조직 안에서 지금은 그의 시간. 그대로 적으로 두는 것보다는 적어도 내게 경계심을 풀도록 하는 게 지혜로운 대처일 것 같았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되었던 지난 시간은 돌이켜 보면 큰 행운이었다. 특히 회사 밖 타인에게 조아려 남의 돈 빌어, 혹은 벌어 와야 하는 직무에 속해오지 않은 덕분이다. 감사한 일이면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에겐 새삼 존경심을 가진다. 나는 고작 내 욕하고 다닌다는 입 멈추게 하려고 난생처음 벌인 일이라지만 매일을 누군가에게 사정하듯 아쉬운 소리 해야 하는 많은 이들에겐 그것이 무심한 일상 아니겠는가. 성질 죽여 가며 아쉬운 소리로 먹고사는 이 땅의 아빠들, 가장들에게 주제넘은 연민을 느낀다. 내가 너무 늦게 배우고 느낀 것을 일찌감치 받아들여 제 것으로 삼았을 그 가여운 마음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요새 화제인 어떤 여인의 말처럼 “뒤에서 어쩌고 저쩌고 ㅈㄹ 떨지 말고 맞다이로 들어오라 그래!” 일갈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녀처럼 마음만 먹으면 현금화할 수 있는 천문학적 자산 같은 거 없으니 그럴 수밖에. 저항의 아이콘, ‘국힙 원톱’ 같은 건 못 돼도 ‘직장인 만렙’을 목표로 오늘도 간다. 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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