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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y 17. 2024

돌고 돌아 도서관 옆 벤치

<18주차 임상 기록>

  며칠 전 왕래가 뜸했던 첫 직장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름 용기 내어 행동한 결과다. 쉰 중반 연배인 선배가 지난해 모교 재단 소속의 이웃 대학 교수로 임용됐다고 들었다. 대학원 재학 중인 나는 박사 진학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다. 오랜만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에 선배는 뜻밖에 환대했다. 약속 정하기까지 일사천리, 어느 날 몇 시까지 교수 연구실로 찾아뵙겠다고 한 게 오늘이다.


  사람 인생 모른다. 선배는 톡 까놓고 ‘에이스’는 아니었다. 자의와 타의가 상호 작용해서 나이 마흔 즈음에 회사를 나왔다. 프리랜서로 벌이하며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들었다. 이후 박사까지 졸업하는 데 팔 년 여, 내 나이쯤 졸업해서 기간제 공무원, 시간강사 등으로 몇 년을 더 보냈다. 그러다 도착한 최종 목적지가 지금의 종신직 교수 보직이다. 잘 나가던 선배 또래 동기들이 회사에서 출구전략을 고민할 때에 선배는 보장된 일자리를 얻었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지만 그가 어떤 혹독한 세월을 견디어 왔을지는 어림짐작이라도 알 것 같았다.


  맨손으로 가기가 뭣해서 제과점에 들러 하얀 케이크를 하나 샀다. 늦을 새라 가파른 캠퍼스 언덕을 쉬지 않고 올랐다. 선배가 알려준 방 호수를 확인하고 문 앞에 서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똑똑똑. 고가의 타악기를 연주하듯 최대한의 공손함과 정중함을 담아 두들겼는데 반응이 없다. 안에 사람이 없음을 확신하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지금, 강의 마치고 방으로 가는 중. 조금만 기다려요.” 굳이 뛰어올 필요까지는 없었음을. 아쉬운 것은 나였으므로 예상 못한 약간의 기다림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간의 격조함을 다시 한번 사죄하며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대화의 공간 바깥으로 상자가 어색하게 퇴장했다. 나는 염치 있는 이기적 인간. 선배 소식을 놓치지 않아 왔음을, 근래의 쾌거 역시 알고 있었음을, 그간의 끝 간 데 없는 노고를, 그래서 지금의 영광이 응당함을, 국민의례의 앞 순서처럼 속행했다. 내 학업적 현재 위치가 어떠한지 빠르게 전제하고 박사 진학이 과연 타당한 결정인지, 금전적 시간적 투입 대 산출로 볼 때 효용은 어떠할지, 그것의 최솟값과 최댓값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초심자 단계에서 선배가 취한 구체적 방법론은 어떤 것이었는지, 얻어내야 할 답이 많아 마음이 바빴다.


  모든 인터뷰가 내 의지대로 전개되었다면 나는 지금쯤 미항공우주국의 허술한 구성원이 되었을지 모른다. 준비한 의식의 앞 순서부터 비행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선배는 금세 타임머신에 탑승해서 본인의 퇴사 시점으로 가버렸다. 사건 발생의 순서대로 그의 지난 궤적을 밀도 있게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 앞에서, 전리품 같은 이 공간이 주는 새삼스러운 도취감, 그것을 덮어놓고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랬다. 아, 벌써부터 천리 길 걷느라 피로하면 안 되는데, 아직 해야 할 질문이, 들어야 할 해답이 의식의 보따리에 한 짐인데. 아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의 지난 일생의 노하우를 총동원한 시간이었다. 상대에게 적당히 호응하면서도 그가 언짢지 않게 고도의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 기술을 발휘하여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타임머신을 가속하는 선배를 겨우 내리게 하여 나의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벤트의 취지를 다시 상기한 선배가 귀중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마지않을 여러 금언이 있었지만 결론 내리자면 이랬다. “Hoon 후배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 싶은데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쓰지만 더 도움이 될 거 같네. 일단 나이가 많으셔. 이 나이에 임용된 것도 같이 해온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나뿐이야. 지금 하고 있는 석사 과정에 집중하시고 그 시간을 즐기시게. 경영대학원 학위가 있는 것은 강점이겠지만 글쎄, 그것이 후에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는 장담할 수 없지. 좋은 얘기 못 해줘서 미안하네.”


  최소한 눈치가 있다면 누가 들어도 최종 발언인 선배 말을 듣고 다시 어색하게 외투와 가방을 챙겼다. 선배님,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미리 허락해 주신다면 다음에 언제고 또 선배님 조언이 필요한 때에 연락 올리겠습니다, 아니 제가 필요한 때가 아니더라도 틈틈이 후배로서 안부 여쭙겠고, 선배님도 아무 때나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제가 도움드릴 일이 하찮은 것이라도 있겠냐만 찾으시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진심 위에 조금 부풀려진 말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입에서 나왔다.


  오늘이 맞춤한 약속이었던 이유는, 이어서 대학원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의 연구실을 나섰더니 시장기가 도적떼처럼 몰려왔다. 마침 강의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뜬다. 학부 때부터 있었던 중앙 도서관 옆 교내 편의점에 들렀다. 삼각 김밥과 플라스틱 단지에 든 노란색 우유를 계산하고 나왔다. 저기 타 단과대 건물 앞 벤치가 마침 비었다. 그래, 여기 편의점 바로 앞에서 학부생들 틈에 끼어 앉긴 뭣하니 저기로 가자. 저쯤이면 척 봐도 그들과 다른 중년 아저씨의 군색한 끼니가 같은 풍경 안에 섞이진 않으리.


  벤치에 앉아서 삼각 김밥 비닐을 뜯고 우유 단지에 빨대를 꽂았다. 오물거리며 한쪽 어깨를 벤치 등받이에 걸쳤다. 시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돌아가는 최대 각도로 고개를 패닝(Panning : 수평축을 중심으로 카메라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촬영 기법)했다. 허 참, 학부생으로 학교 다니던 이십 년 전부터 세상 만물이 변했는데 어떻게 이 스폿, 이 화각에 담긴 풍광은 이토록 변한 게 없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찰나에 점등됐다.


  그때, 이런 사유마저 가동됐다. ‘이십 년 전 어느 때에도 바로 이 벤치에서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지우면서 일자리, 돈벌이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밀어냈는데 한참 시간이 흘러서 오늘도 똑같은 마음으로 여기 앉아있구나. 돌고 돌아 고작 제자리구나. 아, 나의 삶이여.’ 삼삼오오 무리 지어 교정을 빠져나가는 젊은 후배들이 몹시도 부럽게 느껴졌다. 내가 바랐던 건 이런 미래는 아니었는데, 허무감에 김밥과 우유를 먹었는데도 배가 차지 않았다.


  수업 들어가자. 주섬주섬 다시 짐을 챙겨 벤치를 벗어났다. 마침 그때,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 퇴근. 오늘 교수님 된 선배 만나고 대학원 수업 듣는다고 그랬나?” 아내가 물어왔다. 나는 완벽한 동문서답으로 교신의 성공을 인지시킨다. “부인, 나 돌고 돌아 제 자리 같았는데 그래도 없는 인생 분에 넘치게 부인은 얻었네. 아주 제 자리만 맴돈 건 아닌가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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