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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y 24. 2024

그녀는 예뻤다

<19주차 임상 기록>

  자기비하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정 수준 단단한 자아와 자존감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기부정을 넘어 자기증오에 빠지기 십상이다. 자기비하(self-deprecation)의 다른 말은 ‘자기저평가(self-depreciation)’다.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합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만 건강한 자기비하를 구사할 수 있다.


  일터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해 내가 가까운 이들에게 쓰는 관용어구가 있다. 나 요새 회사에서 겉절이 됐잖아, 말한다. 겉절이는 말 그대로 충분히 익히지 않고 겉만 얼른 양념에 절여서 먹는 채소 반찬이다. 회사 조직의 특정 부서나 기능 분야에서 오래 일하며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두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낸다. 재주껏 업무 요령을 익혀 빠르게 효용을 증명해야 하는 내 처지가 겉절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기왕이면 맛있는 겉절이가 되겠노라. 그렇게 결심하며 출근한 오후였다. 누가 어깨를 톡 친다. “팀장님, 여기 계셨군요. 저 오늘까지 출근이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그동안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잘 지내시고 이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뵈어요.” 옮겨온 사무 공간에서 뜻밖에 인물과 마주하는 터라 시각 정보를 인지하고 처리하는 데 시간 지연이 있었다. “어? 어! S 씨. 나 뭐 이제 팀장도 아닌데. 아, 얼마 전에 이달까지만 일한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게 오늘이구나. 외국 현지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며. 그래요, 그동안 고생 너무 많았어요.” 진심을 담아 덕담했다. S는 이른바 폴더 인사로 답하며 사무실을 돌아나갔다.


  S는 내가 지난해까지 일했던 조직 부문에서 옆 팀 막내 직원이었다. 그녀에게 가진 인상은 그랬다. 얼굴 한 번 찡그리는 걸 못 봤다. 잰걸음으로 분주한 와중에도 늘 빙글거렸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파견직에서 계약직으로, 지난해에는 마침내 정규직으로 고용 신분을 갈아입었다. 청년 실업의 대위기 속에서 입지전적인 성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나이 차이가 적지 않아서 나와는 눈에 띄는 친분을 만들진 못했다. 다만 업무적으로 왕래할 때면 그래도 내가 선배랍시고 성심성의껏 챙겨준 희미한 기억은 있다. 막내 조카 같은 이가 동분서주하는데 마음 쓰이는 게 당연했다.


  S가 돌아가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벅찬 감정이 뒤늦게 부풀어 올랐다. ‘겉절이 신세인 나한테까지 인사하러 오다니.’ 나는 부문을 옮기면서 한 건물이라지만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S는 퇴직 인사를 하려고 나름의 목록과 시간 계획을 만들었을 것이다. 작정하고 돌아다니려면 시간과 발품이 필요하다. 그런 중에 이제는 멀리 다른 부서로 가버린, 끈 떨어진 갓 같은 중년 아저씨를 떠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터.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미시세계의 확률에 수렴한다. 그 바쁜 목록에서 내 이름 하나쯤 빠진다고 아무도 나무랄 사람 없었다. 그런데도 S는 굳이 내 이름을 떠올렸다. 그런 다음 나의 현재 위치를 수소문했을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S는 어딜 가서도 잘할 것이다. 별 볼 일 없어진 나한테까지 굳이 와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착하고 성실함, 그것 하나만으로 증거는 충분하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커다란 마음의 선물을 주고 떠났다.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이 여진처럼 몰려왔다. 이제 S와 나는 이역만리에서 떨어져 지낸다. ‘이다음에’ 보자고 했지만 어쩌면 오늘 만난 것이 이번 생에 마지막 보는 것일 확률이 현실적으로 더 높다.


  그녀는 예뻤다. 마음이. 그것보다 예쁜 마음이 어디 있으랴. 나야 끈 떨어진 갓, 아니 패랭이도 못 되는 신세라지만 그녀만은 마음껏 꿈을 펼치길 바란다. 나이 차오르는 나와는 달라서 당분간 겪지 않아도 될 고용 불안, 그 안락함을 물리치고 새롭게 도전하는 용감하고 예쁜 마음이 더 큰 결실을 맺길 마음 깊이 응원한다. 그리고 혹시 우주의 작은 기적처럼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됐을 때는 나도 지금보다 더 숙성되어 진한 향과 멋을 품은 사람이 되어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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