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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y 31. 2024

잠깐의 불편 vs 일생의 장애

<20주차 임상 기록>

  나는 장애인의 가족이다. 출근하는 엄마를 대신해 어릴 적 나를 길러준 엄마의 동생, 이모는 걷지 못한다. 내가 믿는 절대자가 어떤 계획에서 인지 이모에게 튼튼한 다리 대신 보이지 않는 날개를 주었다고 믿었다. 장애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두었음에도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어떤 단체의 활동은 영 불편하고 거슬렸다. 가뜩이나 고생스러운 출근길, 전철 승강장에서 벌어지는 단체와 공권력의 충돌은 그야말로 넌더리 나는 현장이다.


  다른 누구와 본격적으로 시비를 가려본 적은 없다. 그냥 내 안에서 두 마음이 이따금 부딪쳤다. 몸 불편한 사람들이 오죽하면 밖으로 나와 사투를 벌일까. 그들도 모르지 않을 텐데, 도대체 들어주는 이 없으니 필사의 각오일 수밖에. 아니지, 그래도 하필 사람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저러는 건 너무했지. 집회와 시위도 사회적 공감대 안에서 해야지, 저렇게 막무가내로 여러 사람 곤란하게 하면 쓰나, 하는 양가감정이 천사와 악마처럼 맞서왔다.


  대학원 특강이 있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강사로서 교단에 섰다. 청중을 고려해서 최대한 쉽게 풀이했을 것임에도 어려운 말이 무척 많았다. 십 분지 일이나 알아들은 것일까 싶지만 두 가지 낱말은 머리에 남았다.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 이해한 바는 이렇다. 공적 이성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합당하다고 받아들일 만한 근거, 혹은 이성적인 추론 과정을 뜻한다. 중첩적 합의는 가치관이나 신념이 다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적 질서에 대해 대체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일단 그 중첩된 부분에 대해 성립시키는 합의를 말한다. 중등 수학에서 배운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 그것을 그려내는 합리적 기준과 절차 정도로 나는 받아들였다.


  강의 말미에 어느 학부생이 김 대법관에게 물었다. “대법관님, 현직에서 판결하실 때에도 오늘 강조하신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가 마땅히 큰 원칙으로 작용했을 걸로 짐작합니다. 그럼에도 자유와 평등, 다수의 행복 대 소수의 희생 같은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치가 충돌할 때 대법관님은 어떤 기준에서 판단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대법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냐 항시적인 것이냐를 보기도 합니다. 다수의 일시와 소수의 항시라면 마땅히 후자를 먼저 살펴야 하겠지요.”


  그 찰나에 나는 며칠 전에도 인상을 찌푸렸던 지하철 승강장을 떠올렸다. ‘그래, 이거다!’ 김 대법관의 대답에 내 안에 오랜 승강이가 끝났다. 내가 겪는 잠깐의 불편,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그것에 그들 머릿수만큼을 빠짐없이 곱하더라도 장애인들이 어쩔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일생을 건 고통에 견줄 수 없구나. 그래선 안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라는 고담준론이 나의 사고 수준에서 말랑하게 만져지는 순간이었다. 도무지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가 잠깐의 힌트로 한 방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잘못은 단체에 있지 않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최초의 사유로 돌아온다. 단체가 시민의 불편을 볼모로 삼기 전에, 광장으로 나가 힘겹게 소리치지 않더라도, 작은 원탁에 마주 앉은 나긋한 음성일 때 들어주었어야 옳다. 그러라고 낸 세금, 그러라고 뽑아놓은 대리인, 그러라고 위임한 권력 아닌가. 일생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철로를 막아서며 어쩔 수 없이 자구해야 하는 나라인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요원하다는 생각이다.


  기실, 대학원 다니며 몇 번 있었던 특강이 다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른바 사회적 성공에 가까운 연사일수록 더 그러했다. 그래 봐야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삶에서 고작 한 사람의 몫에 불과한 체험담이 공허하게 들리는 때도 있었다. 한데 이번엔 달랐다. 적어도 하나의 난제를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 다짐한다. 앞으로의 출퇴근길 그들 단체 때문에 그 어떤 곤란을 겪더라도 미간을 찡그리지 않으리라. 맞는 비유일지 자신 없으나,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않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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