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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07. 2024

글감 없음의 행복

<21주차 임상 기록>

  연재를 시작하고 어떻게든 쓸 거리를 탐색해 왔다. 굳이 찾지 않아도 뭐든 걸려들었다. 기분 좋은 일들만 있지는 않았다. 외려 기분 상하고, 화나고, 성질 돋우고, 분노케 하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적어도 직장에서는 그러했다. 그게 원동력이 되어서 써서 남기는 것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글감이 없었다. 내일이 연재 글 올리는 날인데, 뭐라도 써야 하는데 어쩌지 싶었다. 어제 늦은 저녁까지도 그랬다. 오늘 출근길 전철 안에서 마음이 고쳐졌다. 아니지, 글감 없는 게 차라리 낫지, 최소한 지난 일주일은 마음 상할 일 없었다는 얘기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 얼마 만에 무탈함인가 싶다. 나이 들수록 거창하게 바라는 게 없어진다. 그저 마음 괴로운 일만 없으면 그 자체로 행복이다. 언젠가부터 생일 되면 바라는 거 딱 하나였다. 값비싼 선물도 진심 어린 축하 인사도 필요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만큼은 저 괴롭히는 인간(정확히는 X끼) 아무도 없게 해 주세요, 절대자에게 유일하게 빌었다. 그거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자축하는 의미가 오롯이 완성되었다.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방증이다. 누군가 그랬다. 네 월급은 지난 한 달 네가 받은 스트레스의 대가라고. 그렇다면 나는 어마어마한 박봉이 분명하다. 성악설이 저절로 믿어지는 아귀다툼의 현장에서 사력을 다해 버티어낸 값어치가 고작 그만큼이라니.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었던 날이 셀 수도 없다. 등가교환의 법칙에서 이건 너무한 처사다.


  스트레스가 왜 큰 것인가. 인간 때문이다. 엄밀하게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공지의 사실로서 회사의 제일 목표는 이윤 창출이다. 그것의 구성단위인 회사원의 목적은 볼 것도 없이 월급이다. 내가 더 가져가려면 네가 덜 가져야 한다. 필연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욕망의 실현은 이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만 위하는 마음은 절대로 선일 수 없다. 악한 마음이 서로 부대끼니 스트레스는 당연한 부산물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동병상련의 마음들이 응결된 글을 보았다. 이른바 ‘사무직을 떠나 행복해진 사람들’이 남긴 소회들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햄버거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부점장으로 승진해 일하면서 만족한다는 사연, 회사는 다시 돌아가기 싫지만 고정적 수입이 있으면서 활동적인 일을 원했는데 발효음료 매니저로 일하면서 행복해졌다는 사연, 식당에서 6년째 일하는데 콜센터에서 6개월 있으면서 앓은 온갖 병이 완치된 사연, 회사 그만두고 커피점에서 일한 3년이 모든 직장생활 중에 가장 행복의 밀도가 높았다는 사연 등이 눈길을 끌었다. 물류 회사 현장직으로 옮긴 어떤 이는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오늘 있었던 짜증 나는 상황, 내일 해야 할 업무, 다음 주 마감인 보고서나 회의, 실적, 전략, 분석, 계획 같은 낱말이 자신의 삶에서 없어진 게 너무나 좋다는 소감을 남겼다. 몸 써서 하는 일이 만만하고 쉬워서 남긴 말들이 아닐 터였다. 모두 인생을 걸고 몸소 체험한 결과들이다.


  나도 그런 삶을 잠시 상상해 본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하루 일이 끝나고 집에 가 누우면 적어도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 그것만으로 큰 만족이 있는 직업 생활일 것 같았다. 한데 상상에 그치는 이유는 자명하다. 나에게 맞춤한 그런 일거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 처자식 건사하려면 지금 월급보다 더 적어지는 건 감당하기 어렵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지만 빵 한 덩이 살 능력쯤은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극적인 글감이 일터에서 찾아지지 않는 당분간의 여러 날도 좋을 듯싶다.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 없고,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퇴근해서 거창한 외식 아니어도 된장찌개, 김치찌개에 사랑하는 아내, 아이와 저녁 지어먹고 포근한 침대에서 잠드는 밤, 간절히 원하는 것 오직 그뿐이다. 현대인의 안빈낙도, 그것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애써보겠다. 단, 스트레스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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