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이기가 어디 쉬운가
<22주차 임상 기록>
나도 모르지 않다. 긍정의 힘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할 거 없어, 다 잘 될 거야, 사람이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래,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말도 있잖아, 영원히 지속되는 고난은 없어,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 넌 마침내 웃게 될 거야, 이런 말들이 우리를 어둠의 골짜기에서 꺼내줄 마법의 사다리임을 오래 들어 알아왔다.
근데 나는 본디 긍정적인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조금만 일상에 균열이 일면 생의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시련이 지진해일처럼 덤비어 올 것처럼 위축된다. 시쳇말로 쫄린다. 어두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회전하며 덩지를 키운다. 불안은 비관이 되기가 일쑤다. 그것이 자책으로 이어진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온 것인가 좌절한다.
여기까지면 나는 진즉 생의 고삐를 놓았을 것이다. 그다지 착하게 나지도 못해서 모나고 삐뚤어졌다. 반골의 기질도 다분하다. 사유는 또 이렇게 흐른다. 긍정적이기가, 낙관적이기가 어디 말처럼 쉽나?! 그게 간단했으면 서점에 수많은 신경 정신과 의학, 심리 상담 서적들이 늘비할 까닭이 없잖은가. 그 옛날 유느님이 「말하는 대로」 될 거라며 노래 부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가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힘주어 강조해온 것이 분명하다.
연초에 ‘불안’에 관한 책을 줄기로 엮어가며 읽었다. 책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낙관적, 긍정적이기만 했다면 지금처럼 만물의 영장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설파한다.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살아남아 유전 형질을 발전시켰을 거라는 게 저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짐승 가죽으로 맨몸을 가리고 수렵과 사냥으로 식량을 조달하던 태고로 돌아가자. 저기 풀섶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별 거 아닌 바람이겠거니 여기던 원시 인류는 대를 잇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우리들의 조상은 ‘저거 범이나 곰 아닌가, 튀자!’ 했던 이들이다.
나는 주특기인 자기합리화에 도달한다. 내가 낙관적이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진화의 당연한 결과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서 맑고 향기로운 냄새만 맡는 이들이 드물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을 시샘하여 괴롭힐 마음은 없다. 나를 비롯한 다수의 현생 인류와 가는 길이 다른, 유느님의 노랫말조차 필요 없는 존재들로 여기며 나의 길을 걷겠다. 잘못이 없으므로 어깨를 더 당당하게 펴겠다. 나는 당당한 비관론자다!
처음에 긍정과 낙관의 힘을 모르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더 큰 의지를 가지겠다. 불안, 걱정, 비관이 인류의 생물학적 본능에 기인했음을 확인한다. 인간이 여느 육상동물과 다른 것은 본능으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 기대, 낙관은 인간의 의지적 이성의 영역이다. 그래서 쉽지 않은 것들이다. 마음이 자꾸만 어둡고 깊은 곳으로 파고들려 할 때마다 거듭 꼬리 끝을 붙잡아 꺼내놓아야 한다. 잘 하고 있다고, 결국엔 네 자리를 찾게 될 거라고, 너는 이윽고 행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아니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마음 속 나에게 지겹도록 말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