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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r 29. 2024

그는 성경의 욥기를 권했다

<11주차 임상 기록>

  나는 회사 조직의 수직적 지휘 체계를 수긍한다. 그럼에도 지휘 책임의 소산인 어떤 관계와도 좀체 인간적 유대를 만들지 않는다. 자연인으로서의 진짜 본모습은 회사 울타리 밖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애당초 회사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는다. 옛 상사와 만나는 것은 내게 무척 드문 일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나는 멘토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인정하여 따를 만한 선배나 상관이 없었다. 회사 조직 안에서 그런 낭만적인 것을 희구한 것 자체가 패착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어떤 이를 만났다. 그는 팀장이었고 나는 그가 새로 부임한 부서의 선임 팀원이었다. 그때까지 만난 회사 상사 가운에 유의미한 격차가 있었다. 그는 말단 부서원의 말도 허리에서 자르는 법이 없었다.


  그가 나를 인접부서의 팀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상관인 부문장에게 내가 적임자임을 피력했다. 승진은 회사원에겐 몇 없는 큰 보상이다. 그러나, 내가 손꼽아 원하던 부서나 직무는 아니었다. 절반의 고마움, 그만큼의 원망이 있었다. 그러다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무게추가 기울었다. 얼마 후 부문장으로 승진한 그가 회사 제도로 마련된 MBA 진학 심사 대상자로 나를 추천했다. 2년여의 학업 기간은 내 인생에 뜻밖에 찾아온 봄날이었다.


  오너가 아니면 회사 조직 안에 영구히 보장된 자리는 없다. 몇 해 전 그가 다른 조직의 부문장으로 가게 되었다. 내심 나도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조금 더 내 달란트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나 말고 다른 동료와 동행했다. 그가 옮겨 가고 몇 달쯤 뒤 둘이 만나 점심 끼니를 나누었다. 왜 나는 남겨두고 가셨느냐 물었다. 납득할 만한 까닭은 그날 들어 알았다.


  그런 그에게 지난 연말, 회사에서 내게 일어난 일보다 훨씬 큰 규모의 악재가 있었다. 그가 지휘하던 부서원이 회사의 이익과 크게 반하는 잘못을 범했다. 지휘 책임의 소홀이란 죄목으로 그도 급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지난 세밑 나는 그에게 물색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부문장님, 다른 기회에라도 꼭 살펴주셔서 저를 휘하로 불러주십시오.” 한 나절도 더 지나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그로부터 답장이 수신되었다. “Hoon 팀장, 알게 될 테지만 내가 자네를 챙길 형편이 안 된다네. 그리고 고난이 삶에서 약이 될 때도 많다는 걸 꼭 기억해 주면 좋겠네.”


  그와 점심 끼니를 오랜만에 다시 나누었다. 요원들의 접선장소처럼 그가 나에게 어느 식당 주소를 보내왔다. 시장기가 알맞게 돋우어질 만큼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재래시장이 있다. 골목 중간 깊숙한 데 위치한 오래된 도가니탕 집이다. 먼저 가서 그를 기다릴 마음으로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를 기다리며 식당 옆 생선가게며 전집, 나물가게를 기웃거렸다. ‘그래, 내가 이런 곳 좋아하는 걸 참 잘 아신단 말이야.’ 회사 코앞 세련된 식당가는 영 내 취향이 아니다.


  오차 없는 정확한 시간에 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부문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 몸을 숙였다. “어떻게 지냈어, 살이 많이 빠졌네.” 도가니탕 두 그릇을 주문했다. 생존의 여부를 서로 말과 눈빛으로 확인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임에도 대화가 틈새 없이 이어졌다. 미리 갖다 준 집게와 식가위로 테이블 구석에 놓인 작은 항아리에서 김치며 깍두기를 꺼내 한 입 크기로 잘랐다.


  역시 첩경은 맘고생 다이어트라는 것, 새로 간 부서에서 어찌저찌 적응하고 있다는 것, 딸아이가 얼마 전 학급 회장이 된 것, 아내가 맞벌이 전선에서 아직 선전 중인 것, 아버지 병세가 깊어진 것, 부문장 도움으로 MBA를 졸업한 것에 이어서 다시 언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 따위가 내가 그에게 제공한 정보다. 당신은 오히려 살이 오르더라는 것, 큰아들이 명문대에 진학한 것, 사모님이 건강하시다는 것,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신앙심이 더 깊어졌다는 것 등은 그로부터 알게 된 것들이다.


  뚝배기 한 그릇씩을 비우고 커피점을 찾았다. 팔목에 찬 묵주를 보며 그가 내 종교를 기억해 냈다. Hoon 팀장, 성경에 있는 내용들 아주 모르진 않을 거야, 하며 말을 이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욥기가 나오네. 욥에게 큰 고난과 역경이 닥쳐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몸까지 병들게 된다네. 그런데 욥은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지. 더 단단한 믿음으로 신의 뜻을 실천한 결과,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잃은 것을 두 배로 돌려주신다네. Hoon 팀장도 꼭 한 번 찬찬히 읽어 보시게.”


  그와 커피점을 나설 때쯤 오전 내내 내리던 찜찜한 빗방울이 그쳤다. 위에서 내리지 않고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불쾌하게 몸을 휘감는 그것이었다. 우산을 접어 홀가분하게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부문장님, 오늘 점심이며 차까지 염치없이 너무 잘 얻어먹고 마셨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다음에 또 기별 드리고 오늘처럼 찾아뵙겠습니다.” 사거리 횡단보도로 향하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 밝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에 좋아. 다음에 또 보자고.” 녹색불이 켜지자 그가 가볍게 뛰어 다른 보행자들과 섞였다.


  아파 본 사람만 그 고통을 이해한다. 그와 나 각자에게 일어난 상실의 경험을 우린 언어로 공유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굳이 말로 통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것이 되레 더 좋은 것도 이따금 존재한다. 오늘 그와 나눈 점심 한 끼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그도 나도 태곳적 욥이라는 사내가 겪은 고통까진 짐작하지 못한다. 두 배로 돌려받는 것까지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일상에 감사할 정도로만 신께서 손에 쥐어주시기를. 횡단보도를 건너는 옛 부문장의 등을 보며 서서 잠시 빌었다. 주여, 그와 내게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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