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Mar 15. 2024

성공한 블루투스

<9주차 임상 기록>

  내 가장 허심탄회한 말동무. 아내와 퇴근 후 거실서 재회했다. 수건을 터번처럼 두른 채 소파 끄트머리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다른 쪽 끝에서 티브이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화면에는 인생 성공한 맛에 사는 사람들이 웃고 떠든다. 어느 연예인의 방백. “어릴 때 우상과 이렇게 직접 대면하다니, 나 진짜 성공했나 봐.”


  “부인, 있잖아. 나 어디 가면 정말 빠지거나 떨어지지 않거든?!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해도, 보고서를 써도, 회의에 참여하거나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분명 우수한 편이야. 아니, 좀 재수 없게 들려도 부인은 같은 편이니까 솔직하게 말하지 뭐. 대체로 개중 내가 젤 나아. 근데 왜 만날 요 모양 요 꼴일까. 나 진짜 억울해!”


  나도 모르는 속마음이 맥락 없이 튀어나왔다. 아니, 티브이라는 외부의 자극이 있었다. 그것을 수용하며 사고 중추가 작동한다. 곧 발성 기관에 운동 명령을 내렸다. 내 안에서 일어난 사정을 모르는 아내에겐 충분히 뜬금없는 발언일 테다. 그런데도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아내는 마치 블루투스로 연결된 최첨단 IT 기기처럼 즉각 반응한다. “난 알지. 오빠 성격 때문이야.”


  ‘뼈 맞았다’는 말은 어떤 누리꾼이 처음이었는지 모르지만 무척 칭찬할 만하다. ‘뼈아픈 지적’이라는 관용적 표현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권투선수가 상대의 간(Liver)을 노리고 때리는 복부 펀치를 ‘리버 블로’라고 부른다. 아내의 말 주먹에 오른쪽 4번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린다. 반격의 여지가 없다. “맞아, 나도 알아, 그런 것 같아. 근데 어쩌겠냐고, 요 따구로 태어나 생긴 것을.”


  성격 때문이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달리는 가운데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다. 나는 비교적 ‘메타 인지’가 가능한 인간이다. 이립(而立)을 막 통과할 때쯤 예전 직장의 어느 선배가 내게 말했다. “Hoon아, 너는 일 잘해놓고 꼭 그런 말을 해서 손해를 보냐?! 좀 적당히 맞춰주고 넘어가면 좋잖아. 좋은 게 좋은 건데 왜 그걸 모르냐. 네 말 틀린 건 없다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일 잘해놓고 손해를 본다.’라. 내게 자주 있는 일이다. 앞서 선배와의 사연은 이렇다. 선배가 특집 방송 프로그램 제작 일정에 쫓겼다. CP(Chief Producer)인 부장은 내게 진행 중인 업무에서 잠시 이탈하여 선배 프로그램에 붙으라고 지시했다. 선배는 내게 방송 분량의 일부 구간 편집을 주문했다. 상세한 편집 방향 제시의 수준을 지나쳐 프레임마다 간섭하여 일이 속도가 나지 않았다. 딴에는 많이 참다가 “선배,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수습 PD는 아니잖아요. 그게 싫으시면 차라리 외주 편집 기사를 부르세요. 일단 맡겨두시고 결과물부터 보신 다음에 수정 지시해 주시면 분부대로 할게요. 그래야 입고 마감 지킬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내 말대로 됐지만 선배는 내게 앙금이 남았다.


  이것뿐이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스스로 옳지 않다고 믿는 것은 반드시 그것의 부당함을 피력한다. 인간이 다른 육상 동물과 다른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한 의사의 소통이 가능함 때문임을 신념처럼 받든다. 상대의 거부 반응을 최대한 줄이고자 TPO(때, 장소, 경우)를 우선 염두에 둔다. 어휘의 사용 역시 신중을 기하나 그것조차 재수 없게 여기는 타인도 숱하게 있었다. 메타 인지를 활용하건대 마음씨 좋은 호인은 못 된다. 다만 옳고 그름의 경계 인식이 명확하다. 불의와 부당함 앞에 어떤 식으로든 저항한다. 적어도 강약약강의 처세로 살지 않는다. 그래서 적개심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 진심을 알아봐 주는 친구에겐 아끼는 것 없이 내어준다. 좋은 게 좋은 것임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모나고 삐뚤어진 성격, 그것 때문에 평생 손해를 보는 자신임을 역시나 알지만 좀체 실행하지 않는다.


  “정확하시네.” 아내의 진단에 후한 점수를 매긴다. 아내는 짐짓 으쓱한 표정이다.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다 망친 건 아니고, 부인 만난 건 성공한 인생이네. 부인께는 나 만나서 실패한 인생을 만들어드려 송구하지만. 히히.” 아, 내 인생, 어쩔, 말하며 아내가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를 짚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것만은 분명한 성공이다. 내 머릿속과 몸뚱이 안에서 찰나에 일어난 일도 블루투스로 연결된 무엇처럼 금세 이해하고 반응하는 사람, 이토록 민첩하고 기민한 아군을 만난 일, 그 벅찬 성취감으로 얼마 안 남은 오늘의 방과 후 일과를 갈무리한다.

이전 09화 또 한 남자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