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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Mar 01. 2024

한 남자 이야기

<7주차 임상 기록>

  내 또래 어떤 사내 이야기를 할 참이다. 그는 전형적으로 ‘머리는 참 좋은데 노력은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어느 날 학교에 불려 갔다. 일전에 전교생 대상으로 아이큐 테스트가 있었다. 전체에서 무려 두 번째로 높은 수치가 나왔다. 사내의 담임교사는 어머니에게 왜 이런 애를 가만히 두냐고 나무랐다. 그럼에도 사내는 도무지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사내는 공부뿐 아니라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다. 꿈이 있거나 되고 싶은 무엇이 있지도 않았다. 준비 없이 입시를 치렀다. 집에서 멀리 있는 대학에 며칠 다니다 재수를 선택했다. 다음 해 그보다 조금 가까운 학교에 붙어 1학년을 다녔다. 징집영장이 나와 2년여 휴학했다. 이후 복학하지 않고 뜻밖의 결정을 밀어붙인다. 도피성 유학이라고 손가락질받을 만한 그것이었다. 게다가 사내의 집은 IMF 외환위기 이후 가세가 급하게 기울었다. 사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처음으로 결심해 본 일이라며 부모 앞에 부복했다.


  사내는 유학길에 올랐다. 부모가 어렵게 보내주는 돈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책을 팠다. 그 나라 언어를 죽을힘을 다해 배웠다. 마침내 외국 학교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왔다. 여느 취업준비생이 그렇듯 감색 양복을 사서 입고 이곳저곳 회사에 면접을 다녔다. 두 군데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 한 곳은 제조업 중견 업체의 영업직이었고 다른 한 곳은 규모는 그보다 못한 ‘경영 컨설팅’ 회사였다. 사내는 고민 끝에 본인의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은 회사에 입사했다. 막내, 수련 과정이 까마득한 초보 컨설턴트가 되었다.


  배우는 즐거움이 컸다. ‘클라이언트’라고 부르는 의뢰 회사로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여러 회사에서 더 많은 여러 사람과 만났다. 그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경력을 쌓아가던 어느 때 굴지의 대기업 전자제품 회사의 중역이 사내를 눈여겨본다. 사내에게 이직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사내는 숙려 끝에 둥지를 옮겼다. 이제 더는 컨설턴트가 아니다. 남의 회사에 어색한 사무실로 철마다 옮기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큰 나의 회사에서 우리 회사 사람들만 상대하면 되었다. 월급도 많이 올랐다.


  Happily ever after. 동화가 아닌 실제의 삶은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몇 해 더 경력을 쌓아 이제는 완전히 전자제품 회사의 일원이 된 어느 날, 사내를 오늘에 있게 한 중역 간부가 업무상 위기에 봉착한다. 간부는 사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그가 불러들인 사람인 사내도 궁지에 몰렸다. 회사란 그런 곳이다. 큰 회사, 작은 회사를 가리지 않는다. 사내는 지금보다 젊고 치기 어렸다. 수치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출구전략 없이 회사를 나왔다. 사내에게 함부로 ‘때려치울 수 없는’, ‘끝까지 버텨야 하는’ 강력한 이유, 처와 자식이 있었다면 다른 결론이었을까.


  사내에겐 대신 오랜 연인이 있었다. 나이가 차는 그녀에게 많이 죄스러웠다. 자의 반 타의 반, 심정적으로는 순전히 타의에 의한 무직자로 지내기 얼마, 그녀가 사내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서울 어느 기초 단체에서 재래시장 안에 청년 창업을 지원한다는 공고였다. 그래, 회사 말고 작게나마 내 것을 차려서 운영해 보자, 사내는 결심했다.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고 예선과 본선, 두어 차례 프레젠테이션에 임했다. 경영 컨설턴트, 대기업 전자회사 직원으로 보낸 시간이 허송세월은 아니었다. 시장 안에 어엿한 자기 가게, 식당이 생겼다.


  시련이 딱 한 번 뿐이면 세상 모든 이들의 삶이 빛나는 역전극일 것이다. 컨설턴트로서 면밀한 상권분석, 아이템 선정, 제조 관리를 했음에도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두 번의 성탄절을 늦은 밤 문 닫은 텅 빈 가게에서 보냈다. 세 번째 성탄절 직전에 오래된 연인과 헤어졌다. 남녀의 이별은 두 사람 말고는 정확한 까닭을 알기 어렵다. 심지어는 당사자조차 영원한 미제인 헤어짐도 있다. 그는 자신의 무능과 불운을 이유로 돌렸다. 더는 가게도 유지할 수 없었다. 조리 설비와 식당 집기를 헐값에 처분했다. 생애 두 번째 무직자가 되었다.


  가리지 않고 구인 공고에 응했으나 면접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부친의 연줄로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사내는 나이 마흔 가까워 부모에 의탁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러나 이제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회사에 다녔다. 의지가 곧 결실이 되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다시 한번 자의와 타의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는 작은 규모를 감안하더라도 도무지 체계가 없었다. 시스템 없는 회사가 사업성과를 낼 리 만무하다. 전직 경영 컨설턴트로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임금이 체불되기에 이른다. 월급 없이 출근하기를 몇 달째 기어이 사표를 던졌다. 사내의 아비는 자식에게 마른자리가 아닌 진자리를 내어줬음에 후회했다. 사내는 부친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한 것에 더 크게 자책했다.


  세 번째 실직자로 지내는 이듬해 봄, 전화가 걸려왔다. 어느 경영 컨설팅 회사 인사부장이라고 밝혔다. 취업 사이트에서 사내의 이력서를 봤더란다. 외국 대학 졸업과 컨설팅 회사 취업, 자영업 창업과 일반 회사 재취업까지, 흥미로운 경력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어 했다. 사내는 오랜만에 양복을 꺼내 입었다. 첫 출근이 생각났다. 식당 주방과 홀에서 동분서주하던 순간도 잠시 스쳤다. 두 번째 회사 입사와 퇴사까지 기억이 흘렀다. 마천루 빌딩 숲 사이 어느 건물 중간층 사무실에서 전화 속 목소리의 실제 인물과 만났다. 면담 같은 면접을 치렀다. 사내는 며칠 뒤 한 번 더 그 건물을 찾았고 그날 저녁 인사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사내는 첫 직업으로 다시 돌아와 오 년 넘게 근무 중이다. 그사이 솔깃한 제안이 아주 없던 건 아니지만 지금 회사와 의리를 지키고 있다. 꾸준히 오르는 월급도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이제는 완연한 베테랑이 되어 그의 손을 거쳐 간 프로젝트가 이력서 몇 장을 채우고 남는다. 천직,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사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 제일 잘할 수 있는 일로 돌아왔음에 감사해한다. 지난해 성탄절은 새로 만난 연인과 오붓하게 보냈다. 결혼 적령기를 넘겨 말 그대로 노총각이 되었지만 그녀와 조금씩 미래를 준비하는 참이다. 사내의 노부모는 요즘만 같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단다.


  자, 실패로 점철된 어떤 사내의 직업 연대기를 길게 들으셨다. 그래서 그 사내가 도대체 누구냐. 바로 필자의 두 살 터울 친동생이다. 필자는 연초 겪었던 회사 인사이동으로 어지럽고 불안한 날들을 보냈다. 얼마 전, 시쳇말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이 된 기분으로 전철역으로 향하던 출근길에 길 건너에서 부모님과 같이 사는 동생과 우연히 마주쳤다. “엉아, 그래서 할 만 해?” 묻는다. 모친으로부터 일터에서 일어난 내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어쩌겠어, 해보는 거지.” 필자의 어깨를 툭 치고 먼저 뛰어간다. “나 요새는 송도에 있는 대기업으로 출근해. 늦어서 먼저 가볼게.” 그래, 어여 가, 손등을 휘저었다.


  희망의 증거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던 나였다. 가만히 보니 실제의 사례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보다 더 한 고비와 혼란을 마침내 넘고 벗어나 지금에 와 있는 사내, 그가 바로 나의 혈육이란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래, 영원한 시간은 없다. 깊은 터널도 마침내 끝난다. 그 끝이 오롯이 내 의지로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포기하지만 않고 열심히 발버둥 치면 저도 모르게 둥실 떠올라 이윽고 그 깊은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길 건너에 산다. 나를 지나쳐 달려가는 동생 녀석 등판이 그렇게 늠름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오늘 저녁, 혹시 동생 녀석 회식이나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데이트가 있으면 할 수 없겠지만, 오랜만에 동네 꼬치구이 집에서 술잔 부딪쳐 볼까 싶다. 형제의 이야기, 그것이 인생 항해에서 어디로 향할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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