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Feb 16. 2024

오! 영원한 친구

<5주차 임상 기록>

  J야,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 여럿과 만나기로 한 저녁, 내가 1등으로 식당에 도착해서 너를 기다렸다. 회사 마치고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 이른바 내 ‘나와바리’니까. 특별한 시간, 오랜 동무들과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 골몰했었다. 그래 서울 구도심이면 이런 데로 가야지. 힙하고 세련된 느낌 나는 곳도 좋지만 나는 사람 사는 냄새나는 오래된 가게가 좋더라. 굴 보쌈을 잘하는 집인데 굴이 안 들어왔다니. 노로 바이러스가 이제는 겨울에도 창궐하나. 불운에 아쉬웠지만 너와 친구들 볼 생각에 아무래도 좋았다.


  J야, 역시 네가 2등으로 들어오더라. 우리 동기들 모이면 늘 너랑 내가 먼저 만나서 친구들 맞이했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은 출발이네. 그래, 나는 네 시간관념 그것도 참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어찌나 반갑던지. 얼마만이냐. 반년은 더 된 것 같은데. 내가 쌍 석사 한답시고 대학원 다시 다니고, 이런저런 선약들과 겹쳐서 두어 번 동기 모임에 불참했더랬지. 너는 살이 붙은 거냐, 빠진 거냐, 그냥 그대로네. 별 탈 없이 잘 지냈다는 방증이니 그것으로 됐다. 모교 후배인 너의 어부인, 그녀와 낳은 너의 두 아들 안부까지 당연히 궁금했다.


  J야, 너는 먹는 게 먼저가 늘 아니었다. 굴 보쌈 집으로 왔는데 굴이 없다는 말에도 너는 그러려니 했다. 상관없어, 보쌈은 그래도 맛있겠지. 너랑 나는 그 점도 잘 어울렸다. 나는 딴에는, 또 꼴에는 식도락가랍시고 입에 들어가는 것 은근히 따져왔다. 넌 내 선택이라면 일언반구의 논평조차 없었다. 어, 좋아. 그게 끝. 어디든 들어가서 맛나게 먹고 거나하게 취했다. 술 마실 때 안주 좀 챙겨 먹으라고 너한테 마누라처럼 잔소리도 몇 번 한 것 같다. 너도 나도 입이 짧아서 빈 속 좀 채우면 저절로 젓가락 놓고 술잔으로만 달리는데 그 점도 닮았다.


  J야, 네가 나에게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살 빠졌냐. 오늘 혹시 다들 어떻게 벌이 하는지, 일터에서는 사정이 좀 어떤지 서로 얘기가 오가면 그때나 넌지시 흘려볼까 했었다. 다른 동무들 없이 딱 둘이 먼저 만났을 때부터 안줏거리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 살 많이 빠졌지, 어떻게 옛날 미모 좀 나오냐? 실은 다이어트 중 최고는 ‘마음고생 다이어트’라고 일찍이 누가 안 그랬냐. 무슨 마음고생? 너 뭔 일 있었구나, 뭔데 그랬어?


  J야, 우리는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앉기로 했었다. 오랜만에 출타이실 게 빤한 어머니 여자 동기들에게 내어줄 안락할 안쪽 자리를 위해서. 나의 오른손, 너의 왼손에 쥔 것으로 쨍 부딪친 첫 잔이 그날의 스타트였다. 겨우 첫걸음 뗀 운동화 끈이 스르르 풀리듯 너에게 털어놓게 되더라. 나 지난 연말에 회사 인사이동 때문에 지금까지 좀 힘들었거든. 언제고 닥칠 일이긴 했는데 마음속 대비가 어설펐나 봐. 오래 했던 팀장 직위도 내려놓고, 일도 지금까지와 딴 판인 것이어서 상실감 느끼고 허둥댔었어. 그래서 그런가, 입맛도 없고 살이 쭉쭉 빠지더라.


  J야, 너의 반응은 정말로 뜻밖에 그것이었다. 야, 나는 재작년 말에 딱 너랑 똑같은 일 겪었잖아. 내가 1년 너보다 빨랐네. 회사에서 갑자기 나더러 다른 사업장에 전혀 안 해 본 업무 하라고 보내는 거야. 일은 적성에 맞았느냐고? 네버!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고. 한 석 달은 만날 퇴사할 생각만 했었던 거 같아. 나 친동생들 왜 요식업 하잖냐, 그거 장사 잘 되거든. 이참에 나도 뛰어 들어서 그거나 같이 할까 싶었지. 시간도 되게 안 가더라고. 하루가 일주일 같고, 일주일이 한 달 같고. 진짜 힘들었어.


  J야, 네가 어지간해서 감정 표현 잘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런 네가 힘들었다고 얘기할 정도면 정말로 그랬다는 거지. 네가 해준 다음 얘기가 더 반가웠다. 이렇게 이어갔었다. 근데 신기한 게 뭔 줄 아냐?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더라고. 처음 몇 달은 지옥이었는데 시간 쌓이니까 그 아귀지옥에서도 지낼 만하게 되더라. 편해지더라고. 옮겨온 사업장에 있는 직원들도 괜찮은 사람이 많고, 특히 나이 많은 선배들이 잘해주는데 진짜 고맙더라고. 사표 낼 생각 쏙 들어갔지 뭐. 그러고 있으려니까 지난 연말에는 다시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더 업무 적성에 맞는 데여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


  J야, 그러고 보니까 지난해에 네가 유독 옛 친구들을 자주 모았었다. 어쩌면 일터에서 생긴 일로 뻥 뚫린 마음의 빈자리를 그렇게라도 채우려고 했던 너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필 그럴 때마다 사정이 안 돼서 참석하지 못한 게 이제 와서 너무나 아쉽고 미안하다. 그때 너의 생업에 그런 일이 생긴 줄 알았더라면 귀담아듣고 진한 공감으로 찬 술잔 뜨겁게 부딪쳤을 텐데. 네 덕분에 우리 옛 동무들 만나는 자리가 더 튼튼해지고 풍성해졌다. 참, 비슷하게 마음고생 했는데 너는 왜 살이 안 빠졌느냐며 너스레였지. 네가 그래도 나보다 느긋하고 품이 넓은 탓 아니겠냐. 난 너의 그 무던한 성격이 너무 좋고 부럽다.


  J야, 이래서 너랑 나랑은 평생 친구인가 보다. 기실 상대생인 나, 공대생인 너, 동아리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같은 캠퍼스 안에서도 전혀 어울릴 일 없었겠지. 처음 너랑 동아리방에서 만났을 때는 이삼십 년쯤 뒤에 종로 안쪽 골목에 허름한 굴 보쌈 집에서 회사원의 비애로 동병상련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이런 게 인생 아닌가 싶다. 사람 앞 일 모르는 거. 그래서 흥미롭고 기대를 품을 만한 인생이지 싶다. 무엇보다 너 같은 친구 둔 거 같으면 꽤 잘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든다.


  J야, 그때쯤 동무들이 앞 다투어 자리에 합류했던 것 같다. 그 저녁 너무도 즐겁고 고단한 일상에 큰 위로를 받았다. 태어나 처음 경험한 것도 있다. 이십몇 년 만에 만나는 여자 동기에게, 그러니까 그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낯선 중년 여성에게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럴 수 없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편한 반말로 “안녕!” 하며 손 인사하는 나 자신이 이상하고 신기하더라. 다 옛 친구 좋아서 저녁 자리 만드는 너의 수고 덕분이다. 고맙다. J야, 나도 너보다 1년 늦은 고비 잘 넘겨볼 테니 그때까지 틈틈이 연락하자. 그렇지 못한 때면 어쩌다 문득 잠깐씩 서로 떠올리기로 하자. 다른 저녁 다른 온기 어린 자리에서 해후하길 고대하며, Hoon이가.

이전 05화 면팀으로 달라진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