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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09. 2024

면팀으로 달라진 것들

<4주차 임상 기록>

  팀장에서 도로 팀원 되며 달라진 것들을 술회한다. 나는 아전인수, 견강부회, 정신승리 따위를 당분간 삶의 기치로 삼기로 했다. 나빠지고 불리해진 것들도 많겠지만 어떻게든 좋고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참이다.


  말 그대로 팀장이란 지위를 잃었다. 다시 수년 만에 팀원이 되었다. 이제 리더십은 내게 요구되는 자질이 아니다. 온전한 팔로워십, 펠로우십이 필요할 뿐이다. 팀장의 지휘와 명령에 복종하여 성실히 임무 수행한다. 동료로서의 의리도 갖추어야 한다. 팀 안에서 적절히 융화하여 한 사람 몫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왕관은 무겁고 권좌는 불편하다. 나 한 사람 몫만 잘하면 되니 편하다면 편해진 것이다.


  인사팀에서 재빠르게 새 출입증과 명함을 주고 갔다. ‘팀장/차장급/프로듀서’로 직책과 직급, 직렬이 병기되던 부분은 단출해졌다. ‘프로듀서’라는 직렬 표기는 스스로 원해서 빼버렸다. 이제는 프로그램 편성과 제작 분야에서 일하지 않는다. 당분간이 될지 앞으로 계속일지는 모른다. 콘텐츠 취급 부서가 아닌 곳에서도 직업의식을 유지하는 게 나을까도 싶었다. 그러다 누가 내 명함을 받아 들며 ‘PD가 왜 이런 일 하는 부서에 있대?’ 반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자, 말자, 빼자. 전부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인지부조화가 정신 건강에 더 안 좋다. 그나저나, 인사팀은 이럴 때만 동작이 빠르다. 뭐, 그들도 그들 일을 하는 것이니까.


  직책 수당이 없어졌다. 많지는 않았지만 일 년 열두 번 받는 몫을 합치면 연봉 앞자리가 바뀔 수 있는 규모다. 아내에게 부서 이동과 ‘면팀’을 알리며 수당 삭감에 대해 얘기했다. “그까짓 거 안 받아도 전혀 상관없어! 관두는 것보다 나아.” 시원한 그 대답이 뜻밖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고마운 철의 여인이다. 그래, 내가 친구들이랑 술자리 몇 번 줄이고 주말에 외식 메뉴 간단한 것으로 바꾸면 되지 뭐. 나만 잘하면 될 일이다.


  법인카드 사용도 중지됐다. 팀장 몫으로 운용할 수 있는 공금이 조금 있었다. 당연히 개인적인 용도면 안 되겠고 업무와 관련한 지출이어야 했다. 그것이 전면 차단됐다. 업무와 관련해 교통비며 식비를 지출할 일이 부득불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도 때마다 팀장 허락을 구해야 한다. 어차피 쌈짓돈 쓰듯 법인카드 결제해 본 일도 없는 사람이다. 간단한 카드지갑에 쓰지도 못할 법인카드 따위 아예 빼서 책상 서랍에 넣어버렸다. 그 덕에 바지 호주머니 맵시가 그만큼은 살아났을 것으로 믿는다.


  근태 관리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한데 이건 팀장 시절에도 일절 책잡혀본 일 없는 부분이다. 전에도 정규 시간보다 최소 삼십 분 이상 일찍 출근했었다. 근면 성실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래야 ‘칼 퇴근’의 명분이 생기고 스스로 떳떳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몸에 밴 생활 리듬이 된 터라 전혀 불편하지 않다. 외려 효용이 더 커졌다. 이전엔 팀원들에게 귀감이 됐을지 어땠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상사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 회사에 남들보다 조금만 일찍 출근하면 실제 업무 완성도와 상관없이 ‘근면 성실하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다. 나름의 직장생활 노하우다.


  회사 동료, 선후배들의 달라진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렇게 됐는지 알 수 없고 그렇게 됐대도 내가 알 도리 없다. 나는 본래 못돼 먹어서 저만 아는 놈이다. 일생 남 눈치 봐가며 살지 않았다. 물론 최소한의 배려는 당연히 갖추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 큰 해 입을 일도 해본 적 없다.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사과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저 양반 팀장 내려오고 엉뚱한 부서로 발령 났대’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할 정도로 구성원들을 한가하게 놀릴 회사도 아니다. 그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나는 묵묵히 내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 된다.


  다행히 일은 아주 못할 것도 아니다. 나는 내 또래 프로듀서 중에서 드물게 문서취급 업무에 능숙하다. 사내 행정에도 밝다. 갑자기 영업 부서로 던져져서 생면부지의 외부인들에게 읍소하며 돈 벌어 와야 하는 업무도 아니다. 비록 방송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거나 편성 전략에 반영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데 필수적인 기능이다. 월급쟁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회사 돈을 지출하는 부서여서 무척 중요하기도 하다.


  새 팀장이 나보다 훨씬 선배이고 고령자인 것도 잘된 일이다. 인사이동 없이 같은 부서에 남아 까마득한 후배에게 고개 조아릴 경지까지 나는 가지 못했다. 팀장이 된 후배에게 일 년에 두 번씩 인사평가 면담에 임하는 일은 상상만으로 괴롭다. 맞벌이하는 아내는 이 대목에서 발끈한다. 오빠, 나는 지금도 만날 그러고 있어. 고맙고 가여운 철의 여인이다. 새 팀장과 비교적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또 감사하다. 그도 나처럼 갑작스러운 인사이동 경험이 있단다. 동병상련이 작동해 주면 나로선 ‘땡큐’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 중간중간 ‘세이브(저장)’ 버튼을 누른다. 캐릭터가 죽은 시점에서 곧바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마치 그 기능을 깜빡하고 맨 첫 판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십 수년을 바쳐온 내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아찔함도 느낀다. 막막하고 허무한 감정도 엄습한다. 하나 분명한 것은 ‘라이프 고즈 온’.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침내 쿠파로부터 피치 공주를 구하는 슈퍼 마리오처럼, 나는 내게 주어진 녹색 버섯의 목숨만큼 달리고 피하고 뛰어오를 것이다. 인생의 높은 깃봉에 닿는 그날까지, 맘마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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