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Jan 26. 2024

아닌 게 어디냐

<2주차 임상 기록>

  1주차 금요일 퇴근에 즈음하여 많이 회복했던 멘털은 주말 사이 또 흔들렸다. 출근하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이전 부서에서 가졌던 일요일 늦은 저녁의 감상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개그콘서트>의 마지막 코너 ‘봉숭아 학당’ 말미에 연주되던 클로징 음악, ‘파트타임 러버’ 없이도 가슴이 턱 막혔다. 출근을 거부하는 직장인의 근원적 기피를 오랜만에 절감했다.


  너무 상심이 크거나 불안이 절정에 이르면 술조차 당기지 않는다. 그런 것도 생존 기반이 탄탄한 조건에서나 기댈 수 있는 것이다. 주니어 시절 억울하게 방송사고의 원인 제공자로 내몰린 적이 있다. 징계 위원회 회부가 결정된 날 저녁,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듯 술을 찾았다. 지금은 아니다. 외려 맑은 정신을 온전히 유지해야 사리분별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정확한 판단력이 있어야 파고를 넘을 수 있다.


  주말, 도서관에 다녀온 것은 잘한 일이다. 인사이동 1주차에는 불안이 극심한 나머지 난생처음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볼까 궁리했었다. 차라리 약물에 의존해서라도 마음의 스위치를 꺼두는 게 일단의 생존에 유리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탐색했다. 드문 사례겠지만 어떤 병원은 비싼 심리 검사를 초장에 강권한다고 한다. 또 가입 연도에 따라 의료 실비보험 적용이 곤란할 수도 있단다. 또 돈이 발목 잡는구나. 며칠 참아보자 하고 대안 삼은 게 정신과 의사들이 쓴 책들이다.


  너덧 권 책을 빌려 읽었다. 제목은 모두 다르지만 닮은 구석이 많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자신의 직업 생애 동안 겪은 수많은 환자들과의 진료 후기다. 세상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불안을 겪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의사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환자를 거울삼아 스스로 치유되기도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여서 필연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구나. 내가 겪는 불안도 삶의 여정 가운데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라고 위안 삼았다.


  회사 안에서 나보다 더 큰 고초를 겪은 어느 선배와 점심 먹고 한 바퀴 걸었다. 내 불안에 대해 듣고 그가 일성을 뱉는다. “Hoon이 네가 아직 고생을 덜했구나?!” 그는 나보다 훨씬 일찍 본인의 전문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조직 구성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물색없이 선배에게 일하시는 것 어떠냐, 계속할 만하시냐 물었다. “정년 후에 할 수 있는 직업 찾기 전까지는 계속 다녀야지. 이 개꿀을 내가 왜 먼저 버려. 어디 가서 몸 쓰는 일 해봐. 한 달에 이삼백만 원 벌기도 절대로 쉽지 않아.” 그는 일찌감치 내려놓고 모든 걸 수용하는 태도다.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한다. 방송가에 흉흉한 소식 일색인데 갑자기 쫓겨나는 것 아닌 게 어디냐. 엄동설한에 칼바람 맞지 않고 튼튼한 벽과 지붕 밑에서 안락하게 일할 수 있지 않은가. 나가라고 임무도 없이 외진 곳에서 면벽 수행 안 시키고 회사 조직에서 엄연히 중요하고 필요한 업무 맡은 건 또 얼마나 다행인가. 살면서 누구나 겪은 상실의 경험,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로 예행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얼마나 훌륭한 선행 학습인가. 고여서 썩지 않고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으로 흐를 수 있는 것 또한 귀중한 기회 아닌가.

이전 02화 지독한 불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