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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Feb 03. 2021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선배와 우리 세 식구가 만나 저녁식사로 고기에 술을 곁들였다. 그와 내가 어울린 건 헤아릴 수 없으나 아내와 딸아이를 동반하여 따로 보는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선배는 나보다 세 학번이 빠르다. 나도 그도 ‘재수 없게’ 대학에 들어왔으니 그가 나이도 세 살 많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동아리 모임에서였다. 통성명을 했더니 그가 전공 선배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직속 선후배 사이. 그와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런 인연의 시작으로 어느덧 스물다섯 해를 지나왔다.     


  동아리 문화가 대체로 그랬고 선배인 그도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선배님 혹은 선배라고도 부르지 않고 그저 형으로 불렀다. 그를 알고 달포쯤 지나면서부터는 높임말도 쓰지 않게 되었다. “형, 수업 언제 끝나?”, “형, 이따 학교 앞 당구장에서 봐.” 이런 식으로 그와 소통했다. 참, 후배들 역시 나와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다.    


  정식으로 그에게 아내와 아이를 소개했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그는 아내를 세 번째, 아이는 두 번째 보는 셈이다. 결혼식에서 처음 아내를, 돌잔치에서 아이를 먼저 봤을 것이다. 워낙 정신없고 부산스러운 날이니 제대로 인사가 오갔을 리 없다. 사실상 초면이다. 아내가 그에게 “남편에게 말씀 많이 들었다.”며 화답했다. 인사치레 같지만 거짓 없는 사실이다. 그가 나름의 재치로 아이에게 두 번째 만나는 거라고 인사했다. 본인 생일임에도 아이는 그 첫 번째를 기억하지 못한다.     


  미리 차려놓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불판에 고기를 올려 굽는다. 아내와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가벼운 대화, 서양 사람들이 ‘아이스 브레이킹’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시도한다. 헌데 그의 말꼬리가 투미하다. 아내에게 묻는 말일진대 흔히 ‘제수씨’ 혹은 아무개 씨라는 주어가 없다. 중간에서 시작한 문장이 존댓말, 반말 구분 없이 두루뭉술하게 끝난다. 덜컥, 가속 페달을 밟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과속방지턱처럼 옆에서 듣기에 자꾸 거슬린다. 그러더니, 술이 몇 잔 들어가니까 어느새 그가 아내에게 아주 말을 놓고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모교 여자 후배를 대하는 듯.   


  이건 아니지, 싶었다. 좋은 취지로 마련한 자리에서 뜻밖에 불쾌감이 피어오른다. 나는 그에게 후배이고 아우다. 편하게 말이 오가지만 무려 세 학번이나 터울이 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내는 그런 나보다 또 몇 살이 어리다. 그와 나 사이에서 갑절을 더 가야 아내와의 나이차다. 그렇더라도 아내는 그의 후배가 아니다. 아무리 상대가 연장자라도 초면에 반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일 수 없다. 아내도 곧 불혹이다. 더욱이 각별한 후배의 반려자이고 그가 목숨보다 아끼는 여자다. 극존칭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존대해야 옳다. “제수씨, 이러이러하잖아요.” 정도의 어휘를 사용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것이 후배인 나에 대한 존중이다.     


  마침 아내가 더 밤이 깊어지기 전에 아이를 씻기고 온단다. 아내와 아이가 들어간 화장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을 꺼냈다. 좋은 날 좋은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형에게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내에게 반말 쓰지 말아 주시라, 형은 친근감의 표현으로 그럴지 모르겠지만 처음 겪는 아내는 당혹스러울 수 있을 것 같다, 형과 나야 언어가 장벽일 수 없는 사이지만 내 아내가 형의 후배나 누이는 아니지 않느냐, 형이 날 아낀다면 배우자도 걸맞게 대우해달라.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다면 이런 긴 소회도 없었으리라. 그는 일순 당황하는 듯 아니 당황하지 않는 듯하며 알았노라 대답했다. 그래 놓고는 아내가 자리로 돌아오자 그 몹쓸 말버릇을 여봐란 듯 이어갔다. 취중이어서 그러려니 짐짓 이해하려고 했지만 점점 더 부아가 치밀었다. 나 역시 취기가 오른다. 그 기운이 분노로 바뀌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얼른 자리를 파하는 게 유일한 상책이다.     


  그가 가고 아내에게 물었다. 그의 반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느냐고. 아내는 남편의 선배이고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이니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말해주는 아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만큼 그가 야속하고 미웠다. 아내에게는 아까 자리 비운 사이에 그에게 조심스럽게 만류했는데 술이 많이 됐는지 고치지 못하더라, 본디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일러두었다.     


  나는 당분간 그를 따로 보지 않을 셈이다. 입장을 바꾸어 내가 편하게 지내는 후배의 처를 만났대도 나는 단연코 그녀를 높여 불렀을 것이다. 왜냐, 편한 것은 후배와 나 사이지 그의 아내가 아니니까, 그게 그녀에 대한 배려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후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일 테고 그래야 마땅하니까. 이십몇 년 묵은 인연을 일거에 물리쳐선 안 되겠지만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해볼 요량이다. 나중에 시간이 더 흘러서 그와 지나간 얘기 할 수 있는 자리가 되면 그때쯤 다시 그 날의 내 감정을 전달할 생각이다.     


  그 저녁 나는 새삼스러운 각오를 다졌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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