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에 아내랑 만나서 소갈빗살 3인분에 곱창전골 1인분, 소주 3병, 맥주 1병을 나눠먹고 집에 왔습니다. 식당에서부터 전철 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는 길까지 둘이서 사는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었습니다. 우편함에서 누런 지로용지를 확인하던 아내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며 일순 표정이 바뀝니다.
“딸 핸드폰 부가이용료 이십삼만오천원 뭐야 이거?!”
딸아이가 얼마 전부터 자기 스마트폰에 설치해서 즐기는 게임이 있는데, 거기서 유료 아이템이라도 샀는지 전화료가 무려 이십만 원이 훌쩍 넘게 나왔습니다. 도어락을 풀고 집에 들어서니 저녁까지 아이를 봐주셨던 모친이 밝은 목소리로 반기십니다.
“엄마, 분위기 안 좋아. 손녀딸 대형사고 쳤어.”
얼핏 얘기를 들으시고는 어머니 낯빛이 하얘지십니다. 부모가 둘 다 애 다그치진 마라, 아빠는 애 다독여줘라, 이르시고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떼셨습니다.
아내는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는 듯 하다 멈칫하더니 차분하다 못해 서늘한 음성으로 얘기합니다. 엄마는 우리 딸을 믿기 때문에 안 좋다는 스마트폰도 일찍 사준 건데, 이런 식으로 엄마의 믿음을 저버릴 줄 몰랐다, 요금폭탄 나오는 거 남의 집 질 나쁜 애들 얘기로만 알았는데 우리 딸이 그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이는 울먹일 엄두조차 안 나는지 잿빛 얼굴을 푹 숙이고 섰습니다. 제가 살짝 떠밀며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해, 하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럽니다.
조짐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딸아이가 몰래 만든 유튜브 채널을 저한테 들켰습니다. 엄마는 조금 더 크면 하라는 말로 못 하게 했었는데 슬쩍 다시 만들었나 봅니다. 외식을 나갔다가 자기 건 배터리가 없다기에 애한테 제 핸드폰을 빌려주었더니 그 때 채널 구독을 누른 모양입니다. 출근길 아빠 핸드폰으로 새 동영상 알림 메시지가 가게 될 줄은 몰랐겠죠. 이번에는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엄마에게서 억지로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슬며시 구독자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200명 막 넘었다네요. 유튜브 채널에 딸아이가 그린 그림, 그걸 이어붙인 동영상, 즐겨하는 게임 영상 따위를 올리는데 그 게임에 욕심을 내다 이 사달이 났습니다.
나쁜 게임회사 놈들. 애한테 게임 화면에서 어떻게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인지 보여달라 했더니 정말 기도 안 차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앱스토어에서 게임 자체가 유료인 것을 다운로드할 때는 패스워드를 넣게 돼있는데, 무료 게임은 그런 것이 없고 그 안에서 유료 아이템을 구매하는 건 역시나 중간 단계가 없습니다. 코흘리개들한테서 ‘코 묻은 돈’이라기에는 엄청난 금액을 이렇게나 쉽게 뜯어갑니다. 게임회사 주가가 연일 상종가를 거듭하는 게 단박에 이해됐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감개무량합니다. 모든 게 서툰 초보 엄마아빠 시절 포대기에 싸서 보건소 드나들며 예방주사 맞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금세 커서 어른보다 스마트폰을 더 잘 다루고, 이런 ‘대형사고’까지 치게 되다니요. 오늘 목요일이 일주일에 한 번 학교 가는 날인데 저도 많이 놀랐는지 아침에 딸아이 열을 쟀더니 살짝 미열이 있습니다. 일단 학교 가서 수업 받다가 아프고 열 더 오르는 듯하면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했더니 엄마가 핸드폰 빼앗아가서 못해, 하는 대답이 냉큼 돌아옵니다.
아내가 생돈 나간 것을 지독하게 속상해 합니다. 다음 주 결혼기념일 선물로 준비해놓은 비상금 얼마를 미리 주었습니다. 기분이 풀어지기는커녕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냐고 캐묻습니다. 오빠 돈 들어오는 거 내 손바닥 안인데 어떻게 모았냐고 따집니다. 엄마의 믿음은 저에게는 원래부터 없던 것이었습니다.
더 나쁜 일이 아닌 게 다행입니다. 어른으로 클 때까지, 아니 커서도 세상에 속고 사람에 시달릴 텐데 그저 안쓰럽기만 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 새삼 와 닿습니다. 뉴스 보기가 꺼려질 정도로 아이들한테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이 즈음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