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어디에서 오는가. 평소 애시청하기도 하거니와 지난 주 방송된 tvN <유퀴즈 온더블록> 제헌절 특집을 나는 특히 재미있게 보았다. 대법관 출신의 유튜버 박일환 전 판사와 소년범 재판으로 유명한 천종호 판사,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가 출연했다. 모두 법조인으로서 일생을 걸고 공익에 헌신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영웅적 면모는 어떻게 태동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어려서 위인전을 읽으면 그렇게 위화감이 들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선 잘 읽고 본받아 너도 그런 사람이 되라는 기대와 주문으로 사주셨으리라. 송구하게도 그럴수록 내 속에선 반감이 움텄다. 본투비 히어로(Born to be a hero). 저들은 나랑은 근본부터 다른 사람들이네. 소싯적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큰 뜻을 품고, 잠시 위기를 겪는 듯 마침내 극복하여 말 그대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영웅적’ 서사. 식상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넘기느냐 마느냐 세간의 이목을 끌 때 나는 뒤늦게 그 숫자에 편입됐었다. 정치와 이념을 차치하고 순수하게 영화적 재미에 이끌려 극장을 찾았다. 크게 몰입하여 관람을 끝낸 소감은 “그래, 이게 내가 찾던 히어로 스토리지.”였다. 지극히 세속적인 보통의 인물,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가 우연한 계기로 억울한 의뢰인을 돕게 되고 그 길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줄거리. 어릴 적 싫어했던 위인전과는 완전히 달라서 내가 열광할 수밖에 없는 전개였다.
다시 <유퀴즈 온더블록>의 출연자 얘기로. 세 명의 법조인은 경력의 출발과 관련해 확실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유재석 진행자가 처음에 어떻게 그 길에 들어섰느냐고 묻는다. 세 사람은 모두 아주 솔직하게 대답한다. 박일환 대법관은 그 일이 단지 재미있어 보여서, 천종호 판사는 편한 일 좀 해보려고, 또 박준영 변호사는 유명세를 얻고 싶어서. 대의와 명분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고 모두 보통의 욕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에 충실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악당은 또 어떻게 태어나는가.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으로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 <조커>를 들여다보자. 주인공 아서 플렉은 뜻하지 않은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르며 사회의 낙오자, 패배자로서 억눌려왔던 욕망을 파괴적으로 드러낸다. 현실 세계의 악당이라고 할 수 있는 범죄자들을 보아도 모두 처음부터 극악무도한 악당으로서 세상의 멸망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이는 거의 없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환경과 우연한 계기 속에서 한 명의 악당으로, ‘슈퍼 빌런’으로 각성하게 된다.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온전히 닮았지만 정확히 반대의 양상을 보여주는 이 같은 차이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어디로 이끌었느냐에 달려있는 듯하다. 영웅도 악당도 처음엔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다 마주하는 우연한 삶의 변곡점에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은 본인의 욕망에서 외연을 확장하여 이타적 가치에 이끌린다. 그러다 이제 그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되어 세상이 영웅이라 불러 마지않는다.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의 욕망에 더욱 천착하여 오직 자기 안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인다. 그가 능력과 권세를 가질수록 세상은 그로 인해 고통 받는다. 세 명의 법조인이 TV에 나오던 날, 천수를 누리고 생을 다한 어느 군인도 언론에 회자되었다. 그가 영웅이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 역시 이런 관점에서 답을 구하면 약간의 힌트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사이드킥’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만화나 영화를 보면, 슈퍼 히어로가 혼자 활동하는 것은 영 힘에 부치는 일이어서 조력자를 곁에 두는 경우가 많다. 그를 일컬어 그렇게 부른다. 배트맨의 조력자 로빈, 아이언맨의 워머신, 슈퍼맨의 슈퍼걸 등이 바로 사이드킥이다. 사이드킥은 히어로가 알아봐준다. 사이드킥 역시 본디 평범한 사람인데 슈퍼 히어로가 그 잠재된 능력을 포착, 발견하여 세계를 구원하는 대업에 동참시킨다. 내 비록 히어로가 되지 못할 운명이라면 사이드킥이라도 되어 봤으면. 지금부터라도 내 주변에 아직 각성하지 않은 상태의 예비 히어로가 누구일지 찬찬히 살펴봐야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