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명절이 마냥 좋았다.
맛있는 음식, 사촌들과의 만남, 두둑한 용돈 등 즐거움이 가득했다. 바닷가에 있는 할머니 댁은 도시와는 또다른 놀거리가 있었다. 바가지 한가득 게를 잡고, 줄낚시로 꼬시락을 잡았다. 밤이면 모래사장에서 불장난을 즐겼다. 명절은 가장 행복하고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결혼하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고생을 부끄럽게도 결혼 전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집안에 고모나 여자형제가 없어서 인식을 못했다. 아내와 딸이 생기니 당사자가 되었고, 뒤늦게 의문이 생긴다.
왜 여자들만 일하지? 왜 여자가 음식을 다해? 왜 시댁에만 오래 머물지? 등의 질문을 했지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어른들에게 혼만 났다.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못난 놈 취급받았지만, 합리적/논리적으로 나를 꾸짖는 사람은 없었다. 즉, 현재 풍습들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의 반증은 아닐까?
우리 집(본가)이 불편하다.
우리 집(본가)에 가면 아내는 불편하다. 힘들까봐 부모님이 특별히 시키는 것이 없지만 아내의 마음은 불편하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어머니와 아내는 같이 목욕탕이나 커피전문점도 다니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어머님, 아버님이 잘해주셔서 너무 좋아. 그래도 불편하긴 해
아내가 자주하는 표현이다. 정확하다. 좋지만 불편한 감정. 잘 지내는 사이에서 이정도인데, 갈등이 있는 고부관계는 더 할테지. 그래서 안타깝다.
처갓집이 편하다
반면 처갓집에서는 둘이 함께 누워서 TV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누워서 같이 TV를 본다. 어쩌면 더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낯짝 두꺼운 나의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내와 나의 성격차이도 있지만, 처갓집에서 사위의 불편함과 시집에서 며느리의 불편함은 다르다. 전통적으로 사위는 백년손님이고, 며느리는 일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가끔 장인어른이 질문하시면 화들짝 하고 일어나지만, 그래도 우리 집(본가)보다 처갓집이 편해진 것은 아내의 불편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혼 남녀의 명절 증후군은 다르다
남자들은 대부분 과식, 과음, 운전 등으로 인한 명절 증후군이고, 여자들은 차례 준비, 집안일 등으로 인한 명절 증후군이다. 이번 명절을 겪으면서 우리 집안에서 바꾸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1) 차례 간소화
그 많은 음식들을 다 만들어 올려야 할까? 음식을 주문하고, 가짓수를 줄이는 것은 어떨까? 하물며 종갓집 제사도 간소화한다지 않은가?
꼭 만들어야 할 음식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걸로 했으면 좋겠다. 조상님들도 후손들이 고생하는 것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을까?
2) 명절 풍습
집에서 명절 음식과 술만 먹을 것이 아니라 가족 외식도 하고, 다 같이 문화생활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족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뜻깊은 명절을 보내는 것 아닐까?
3) 처갓집 챙기기
명절이면 아내도 엄마가 보고 싶을 것이다. 처갓집에서도 딸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지. 원래 그렇게 해왔으니깐 시댁에만 오래 머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에서야 처갓집을 다녀왔다. 전통이고 풍습이라 이해는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 시대착오적인 전통보다 합리적인 것이 좋다. 설날은 시댁 먼저, 추석은 처갓집 먼저 인사드리는 것은 어떨까?
위의 시도들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전통에 맞서는 것이고, 권위에 맞서는 것이고, 다수에 맞서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어른들이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변화에 성공하려면 어른들의 기분 상하지 않게, 예의를 지키면서, 우회적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다.
※ 명절에 일하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와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