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밍아빠 Dec 04. 2017

부끄러웠던 하루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배운 것.

딸의 재롱잔치

주말에 딸의 유치원 재롱잔치가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집에서 음악을 틀고 연습하는 것을 보긴 했다. 곧 잘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자 내가 더 설레고 긴장되었다.


내가 6살 때 재롱잔치 무대에 올랐던 날이 떠오른다. 한복 입고 마이크 앞에서 구연동화 같은 것을 했는데, 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무심결에


"거 뭐라 카더라.."


라고 말한 것이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와서 부모님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의 나보다 어린 딸이 훨씬 난이도 있는 공연을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공연장 풍경

공연 2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앞쪽 자리는 다 찼다. 학부모들이 유난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유치원에서 인원 관계상 공연을 오전, 오후로 나눠 진행하는데, 아이 둘이 각각 오전, 오후반에서 공연하는 부모님들이 아침부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도착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사전 리허설을 했는데 아이돌 공연만큼이나 재미가 쏠쏠했다.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부모들은 자녀가 나올 때마다 호응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후 6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차례에 앞으로 나와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소중한 순간을 일초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열정을 보였다.


드디어 딸의 차례

앞으로 나가서 뒷자리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몇 번을 뒤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나 해서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고 찍는데 화면이 까매진다. 웬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마음이 조급했다.


"아저씨, 뒤에서 영상 찍고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제 옆에 와서 찍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딸과 같은 반 학부모인 것 같다. 시커먼 남자 둘이 나란히 땅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녀를 핸드폰에 담는다. 문득 웃음이 피식 나왔다.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도 아빠니깐 가능한 일이다.


딸의 공연이 끝났다

딸이 2차례 공연을 하는데 차례가 앞쪽이라 빨리 끝이 났다. 그 이후 공연은 흥미가 떨어졌다. 모르는 아이들 공연에다 리허설 때 이미 본 공연이다. 아직 재롱잔치가 끝나려면 1시간이 넘게 남았다.


우연히 화장실에 가다가 아이의 반 학부모를 봤다. 반가움 마음에 인사라도 하려고 다가가는데, 아이들이 모여있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딸아이가 있나 싶어서 어깨너머로 바라보니 땅바닥에 찬바닥에 앉아있는 딸이 보인다.


'1시간이나 저기 저렇게 더 앉아있어야 하는 거야?'


딸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까 봤던 학부모와 담임선생님의 대화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OO엄만데, 아이 데리고 가도 되요?"

"네, 어머니 공연 끝났으니 데려가세요"


딸의 친구 어머니는 이이 손을 잡고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선생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려 본다.


"안녕하세요? 슈밍 아빠입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아이 데리고 가도 되나요?"

"네, 불러드릴게요"

우리 집에 가면 안 될까?

담임 선생님은 딸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공연장 안에 있는 아내를 불렀다.


"우리도 먼저 나가자"

"무슨 소리야? 아직 공연 안 끝났어"

"슈밍이 공연 다 끝났어"

"유치원 재롱잔치에 그러면 안돼. 다른 애들 공연하는데, 자리 비우고 가면 어떡해?"

"다른 부모도 데리고 나가던데.."

"특별한 사정이 있겠지. 예의 지키고 다 마치면 나가자!"


아내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해서 딸을 데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빈자리가 보인다.


'좌석이 비어있으면 공연하는 아이들이 서운하겠지?'


괜히 무안해서 일부로 박수를 크게 치고, 오버해서 호응을 했다.


공연이 끝나자 선생님들이 앞에서 무대인사를 했다. 아마 아이들보다 선생님들이 더 고생 많이 하셨을 테지..

딸아이 담임선생님과 안면 있는 선생님들이 수척해 보인다. 인사하는 선생님들께 박수를 크게 쳤다.




뒷자리 사람 생각하지 않고 일어서서 공연을 보고, 시끄럽게 떠드는 학부모를 속으로 욕했다.


'사람들이 매너가 없어.'


하지만 공연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내 아이만 데리고 자리를 비우는 것은 더 매너 없는 행동이 아닌가? 더군다나 무대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아내의 제지로 마지막까지 남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이 남는 하루다.


다음부터는 예의와 배려심을 가지고 참석해야겠다.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 공연 준비하느라 고생 많이 하신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딸과 함께하는 색종이 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