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칠공부 뽑아주세요
오후 4시 30분. 한창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한통 왔다.
"네~ 장모님"
"아빠아아~"
"어~ 슈밍이구나"
"아빠, 나중에 색칠공부 뽑아주세요"
"그래, 집에 갈 때 가져다줄게"
며칠 전. 딸이 만화 캐릭터가 인쇄된 종이를 들고 열심히 색칠을 했다. 그리고는 '짜잔'하고는 나에게 내밀었다. 유치원에서 친한 친구가 나눠준 거라고 했다.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자랑을 많이 했나 보다.
딸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 친구가 부럽다고 했다.
"에이~ 그거 아빠도 뽑아줄 수 있어!"
"진짜? 진짜?"
딸은 순식간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큰소리쳐놓고는 걱정이 되었다.
'인터넷에 그런 게 있을까?'
'회사 프린터로 출력하는 게 눈치가 보이는데'
다음날 인터넷에 '색칠공부' 키워드를 검색하니 공유해놓은 자료가 많았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 복 받으소서.
컴퓨터에 받아놓고 사람들이 다 퇴근하고 조용한 시간에 몇 장 출력을 걸었다. 여러 명에서 공용 프린터를 사용하는데 바쁜 업무시간에 개인자료 뽑는 것이 민폐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개인 자료를 회사에서 뽑으면 안 된다.
딸과 덜컥 약속을 한터라 몰래몰래 몇 장 뽑는 것이다.
뭔가 도둑질하는 기분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누가 사무실 문을 열고 후다닥 뛰어들어온다. 옆 부서 까칠한 여자 선배다. 직설적인 성격과 규정대로만 행동하는 사람. 잘못된 것은 상사든 동료든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사람이다.
"아직 퇴근 안 했네요. 나 급히 프린터 할 게 있는데.. 컴퓨터 잠깐 빌려 써도 될까?"
"아~ 그럼요"
선배는 컴퓨터를 두드리고 프린터로 달려가서는 앞서 출력된 내용을 집어 든다.
'이거 뽑았다고 뭐라고 하는 거 아냐?'
혼자 속으로 뜨끔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푸하핫~ 딸이 벌써 이런 거 할 나이가 되었네"
"네, 그 캐릭터 좋아해요. △△는요?"
"우리 △△는 자동차 제일 좋아해요"
"역시 남자아이는 차를 좋아하네요"
"참 좋은 아빠야. 딸 이런 것도 챙겨주고.."
"C과장님(남편)은 안 그러세요?"
"그 이는 자기 것만 관심 있어요. 암튼 고마워요."
선배는 나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고 출력물을 챙겨서 퇴근했다.
서로가 아빠고, 엄마라서 그런 건지,
내 컴퓨터를 빌려 써서 그런 건지,
원래 원만한 관계라서 그런 건지,
어찌 되었건 다행스러웠다. 예전에 다른 선배가 개인자료를 출력하는 것을 문제 삼아서 한바탕 난리 피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출력한 색칠공부를 나눠주니 딸이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다.
"아빠 고맙습니다. 또 해주세요"
마음 졸인 보람은 충분히 있네. 하지만 다음에는 마음 편하게 밖에서 돈 주고 출력하련다. 돈 몇백 원에 꼬투리 잡히고 싶지는 않거든.
※ 규정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많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납득할만한 일은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문제를 삼는다면 그때는 규정에 입각해서 판단하게 됩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하루였습니다.